[동아광장/조동호]퍼주기, 안 주기, 잘 주기

  • 입력 2008년 11월 28일 02시 59분


시인 이상(李箱)은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는 말을 남겼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그의 절망이 문학의 본질에서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문학은 다른 예술과 달리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않아도 글만 알면 누구나 평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자존심 강했던 이상은 그것이 절망스러웠고, 오감도 연작에서처럼 거꾸로 나열된 숫자나 수학기호의 난무와 같은 기교로 나아갔다. 그러나 언어가 아닌 기호의 나열은 더는 시가 아니었고 이상은 다시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교를 통해 절망을 극복한 듯 보이게 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절망은 그대로 남았던 것이다.

지난 20년의 남북경협 역사 역시 유사한 경로를 밟아 오고 있다.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햇볕정책의 이름으로 남북협력 증진에 온 힘을 쏟았다. 당시는 남북경협이 절망에 빠져 있던 때였다. 노태우 정부에서 시작된 남북경협은 1991년 기본합의서를 계기로 잠시 활성화 분위기를 보였지만 이내 정체를 면치 못했다. 외면적으로는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가 정체의 이유였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북한의 경제난과 폐쇄적인 경제정책에 있었다.

北정책변화 못이끌었던 경협

경제난은 남북교역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물건을 사오자니 품질이 조악해서 사올 것이 없었다. 물건을 팔기도 어려웠다. 북한이 살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투자의 경우는 더욱 곤란했다. 전기도 없고 도로 철도도 부실하고 노동시장도 내수시장도 없는 북한에 투자를 할 기업은 없었다. 게다가 북한 경제정책의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만약 북한이 시장경제체제로의 변화를 추구하면서 본격적인 개방에 착수했더라면 경제난이 해소됐을 것이고 교역 및 투자환경도 크게 개선됐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여전히 ‘주체경제’만을 외치고 있었다. 경협이 절망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햇볕정책의 의지만으로 경협을 발전시킬 수는 없었다. 절망의 본질이 해소되지 않는 한 시장의 자율적 판단에 맡겨서는 경협이 진전될 수 없으므로 정부가 주도하는 형식으로 경협을 끌고 갈 수밖에 없었다. 기교의 등장이었다.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공단 건설사업이 차례로 성사되었지만 이는 절망을 해결하지 않고 해결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교였다. 절망의 근본 원인인 북한 경제난과 경제정책을 그대로 둔 채 금강산과 개성이라는 북한 내의 ‘남한지역’을 만드는 방안이었기 때문이다. 10·4선언의 해주 산업단지나 남포·안변 조선단지 역시 기본적으로 동일한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기교로 절망을 이길 수는 없다. 2008년 현재까지도 개성 이외에는 제대로 진행되는 투자사업이 없다는 점은 절망의 근본 원인이 그대로 남아 있음을 입증한다.

이명박 정부가 ‘비핵·개방 3000’이라는 슬로건으로 북한의 변화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그래서 원칙적으로는 타당한 방향이다. 경협의 절망을 직접적으로 해결하겠다는 의사이며 기교로 우회하는 전략을 채택하지 않겠다는 의지인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전략이 없어 보이는 점은 심히 아쉬운 일이다. 대북 전단 살포를 막을 근거가 없다더니 북한의 태도가 강경하자 생뚱맞게 ‘고압가스 안전관리법’으로 단속하겠다는 등 지난 정부의 대북 저자세를 비난하면서도 여전히 체면만 구기며 끌려가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또 이산가족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중요한 과제로 내세웠지만 상봉조차 하지 못했다. 개성관광이 중단되고 개성공단이 폐쇄 위기에 처해도 의연하게 대처한다는 말 이외엔 하지 못한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당연히 북한에 있지만 그런 북한을 다스리는 전략이 없다. 기다림도 전략이라지만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전략 속의 기다림이어야 한다.

북한 특수성 고려하는 지혜를

남북경협의 성과는 발전시키고 잘못은 고쳐 나가는 작업이 실용이다. 남북경협의 특수성을 무조건 강조해서는 안 되지만 경제라는 일반성 위에 북한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절망에 빠질 우려가 있다. 퍼주기는 안 주기로 대처하지 말고 잘 주기로 바꿔야 하며, 북한의 근본적 변화도 중요하지만 우리 정책의 정밀 조정도 중요하다. 시인 고은의 평처럼 “이상을 만난 이후 이상은 하나의 유치한 때의 향수로 남겨질 따름”이어야 한다.

조동호 이화여대 교수·북한학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