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배극인]“건전성 규제 유예하자” 뻔뻔한 금융권

  • 입력 2008년 10월 21일 02시 59분


정부가 ‘달러 가뭄’을 해소하기 위해 은행의 달러 빚을 1000억 달러까지 지급보증 한다는 금융시장 안정대책을 19일 내놓자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은행의 선의(善意)를 믿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얘기. 은행이 정부 보증을 바탕으로 싸게 빌린 달러를 정부 의도와 달리 금리차나 환차익을 노린 ‘돈놀이’에 나설 수 있다는 염려가 있다. 일각에서는 은행이 무분별한 해외 차입에 나섰다가 행여 빚을 못 갚게 되면 정부의 외환보유액이 소진되고 국가 신인도가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도 나온다.

정부도 은행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지급보증 수수료가 얼마인지를 놓고 머리를 싸매고 있다. 지급보증을 선 자금의 사후관리도 뜨

거운 감자다. 금융감독원은 20일 시중은행 자금담당 부행장을 소집해 정부의 지급보증으로 조달한 달러를 방만하게 운용하는 은행이 적발되면 강력히 제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 대책에 고무된 탓인지 금융시장 일부에서는 당혹스럽게 비칠 수 있는 주장도 나온다. 한 보험사 회장은 20일 언론사에 e메일을 보내 “증시안정을 위해 앞으로 1년간 건전성 규제를 유예하자”고 주장했다.

나름대로 다급한 사정이 있었겠지만 정부는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상황이 워낙 급박해 정부가 지원에 나선 틈을 타 금융회사의 ‘고질병’이 다시 도지려 한다는 것이다. 정부 당국자는 “한국이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접적인 충격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외환위기 이후 강화된 건전성 규제 때문”이라고 말했다.

‘모럴해저드’라는 영어는 ‘도덕적 해이’라는 애매한 한국어로 직역된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자기책임 부재’라는 정확한 용어로 의역해 쓴다. 자기책임을 못했으니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경고를 적확하게 담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초래된 주요 원인 중 하나는 금융권이 바로 이 ‘자기책임의 원칙’을 망각하고 탐욕의 버블을 키우는 데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기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자기책임 원칙’이 훼손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 아이러니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 현재의 위기가 미래의 위기로 이월될 뿐이다.

정부에는 이럴 때일수록 오히려 금융권의 모럴해저드를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배극인 경제부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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