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동원]서울공대 의사, KAIST 변호사

  • 입력 2008년 10월 21일 02시 59분


“한국이 평화상 말고 다시 노벨상을 탄다면?”

다양한 직업을 가진 지인들이 며칠 전 자리를 함께했다. 일본이 이틀 연속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잇달아 거머쥐던 때. 화제는 자연스레 노벨상으로 이어졌다.

솜씨 좋은 한국의 성형외과 의사가 노벨 의학상을 받지 않겠느냐는 우스개(?)까지 나왔다. 성형도 결국 박애(博愛)에 속한다며….

요즘 서울 강남 빌딩마다 한 집 건너 간판을 내거는 성형외과 개업 러시를 빗댄 말이다. 이공계 대신 의대로 몰리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주위를 한번 비춰봤다. 농(弄)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그만두겠습니다….”

다국적 기업의 간판 격인 한국IBM의 한 직원이 얼마 전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통보했다.

서울대 이공계열을 졸업하고 KAIST에서 석사를 마친 유망주였다. 얼마 전 만난 이휘성 한국IBM 사장이 직접 전한 얘기에는 이공계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꽤나 우수한 인재라고 생각돼 “열심히 하면 보람 있을 것”이라고 자주 격려까지 했던 직원이라 충격이 작지 않았다고 했다.

“사법시험을 보려고 합니다….”

그만두는 이유에 한 번 더 놀랐다. (국가를 위해) 더 큰 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사시를 봐야 할 것 같다는 얘기였다. 이미 진로를 결정하고 예의상 알려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뜯어말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과학대국의 미래를 짊어졌다는 KAIST 졸업생. 이 중에는 사법시험을 통해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려는 ‘예비 법조인’이 적지 않다. 게다가 의사로 방향을 튼 졸업생은 수두룩하다.

2005년부터 지난해까지 KAIST 학부 졸업생은 2150여 명. 이 가운데 166명이 국내 의학 및 치의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는 자료(올해 국정감사)가 잘 말해준다. 100명 중 8명 정도가 의사로 ‘턴’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도 해마다 가속도가 붙고 있으니 주목할 만한 세태(世態)다.

KAIST뿐만이 아니다. 서울대, 포스텍, 연세대, 고려대 등 이공계 졸업생 중 상당수도 ‘의사 대열’에 동참했거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변호사, 의사가 되겠다는 이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이들이 20대 초반에 꿈꿨던 초심(初心)이 ‘자의 반 타의 반’ 무너진 현실이 안타까울 뿐.

#“부(富)는커녕 명예조차 얻을 수 없다는 게 젊은 과학도들 고민의 핵심이다.”

서울의 유명 대학에서 순수과학을 가르치는 친구 K 교수는 이렇게 명료하게 정리했다.

엔지니어, 과학자로 명예를 얻을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을 젊은 과학도들이 간파했다는 얘기다. 실험실을 지키는 노(老)과학자 중 억대 연봉을 받는 사람은 ‘희귀종(種)’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란다.

한국 과학자 중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다는 서울대 임지순(물리학) 교수.

일부러 고급 승용차도 타고 다니고 해외 출장 땐 웬만하면 비즈니스석을 이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왜일까?

이공계를 나와도 잘살고 대접받을 수 있다는 걸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그의 말은 왠지 가슴을 저리게 한다. ‘이공계의 위기’를 푸는 열쇠는 이것 말고 달리 뾰족한 게 없는 것 같다.

정부와 기업이 나중에 지원을 하려 해도 지금 타이밍을 놓치면 ‘떠나 버린 비행기’다. 젊은 과학도들께도 장인(匠人)정신으로 다시 무장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다.

‘위기(危機)=위험+기회’라 하지 않던가. 힘내라 힘!

김동원 국제부 차장 davis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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