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문명]俳優로 산다는 것

  • 입력 2008년 10월 15일 22시 03분


미국의 역사학자 다니엘 부어스틴은 “명성(fame)과 위대함(greatness)의 잣대가 현대사회에서 달라졌다”(책 ‘이미지와 환상’)고 말한다. 옛날에는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이었지만 현대에는 명성과 위대함이 꼭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의 명사(名士)들은 스스로 만든 ‘업적’이라는 실체가 있었지만 미디어가 발달한 현대 사회의 명사들은 영상매체라는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얘기다.

그의 지적처럼 현대인들은 점점 명성과 위대함을 구분할 능력을 잃어 ‘큰 이름이 곧 큰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삶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꿈을 부추기는 이미지들 때문에 본질이 아닌 허상을 좇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신념과 용기’라는 내면의 힘을 따르면 살았던 과거의 영웅들과 달리 ‘스타’라고 불리는 현대의 유명인들은 타인들이 지배하는 시장(市場) 만족이 우선이다. 자기만족과 타인만족, 즉 이미지와 실체 사이의 괴리 속에서 가장 큰 심적(心的) 고통을 겪는 이들은 당사자들이다.

배우 마릴린 먼로는 자서전 ‘마이 스토리’에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체성의 혼란을 이렇게 털어 놓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보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해 자신들의 음란한 생각을 본다.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면서 나를 멋대로 지어낸다. 그리고는 자기들의 환상이 깨지면 내 탓으로 돌린다. 내가 자기들을 속였다는 것이다.…”

‘섹스 심볼’ ‘백치미’라는 그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인조 영웅’을 만들어내는 대중의 심리를 꿰뚫고 있는 그의 시선은 철학자를 연상케 할 정도다. 그는 스크린에선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았지만 실제 삶에선 진정한 사랑을 나눌 한 남자를 찾지 못해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렸다. 두 번의 이혼에 따른 정신적 상처와 (유전적) 우울증을 약물에 의지하며 살았다. 그는 “스크린 밖에서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다. 배우의 영혼에 5센트의 가치조차 인정해주지 않는 헐리우드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배우들의 고통을 마냥 동정할 수만은 없다. 그들이야말로 미디어의 가장 큰 수혜자들 아닌가. 미디어가 없다면 만들어질 수도 없고 돈과 명성을 얻을 수도 없다. 그들의 결혼생활, 성적(性的) 습관, 취미, 패션 같은 것들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삶의 노출’을 대가로 돈을 버는 직업적 특성상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스타의 본질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목받는 데’에 있다. 악평도 헛소문도 어떻든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가수 마돈나는 일부러 스캔들을 만들어가며 성공했다. 놀림, 조롱, 비난 한 가운데를 뚫고 나가며 대중에 휘둘리는 게 아니라 대중을 속이고 분노케 하고, 얼르고 달래는 능수능란함이 그의 장수(長壽)를 가능케 한 비결이다.

살다보면 누구든 고통스럽게 주저앉게 되는 절망의 순간이 있다. 스타에게는 악평과 헛소문에 휩싸일 때가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면서 스타 되기를 원한다면 부도 위험 없이 사업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헛소문을 퍼뜨리는 사람들은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겠지만 배우들도 헛소문에 쉽게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 허망한 것들과 소중한 목숨을 바꾸는 일을 지켜보는 것은 충격이자 스트레스다. 더 이상 그런 일이 없었으면 한다.

허 문 명 논설위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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