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박제가와 멜라민 파동

  • 입력 2008년 10월 10일 02시 58분


“우리나라 사람은 툭하면 우리 음식이 중국 것보다 낫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이는 근본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더러워서 입에 댈 수도 없는 것이 된장이다.”

한국인의 자존심이 상하게, 이처럼 도발적인 주장을 한 사람은 18세기의 대표적 실학자인 박제가(朴齊家·1750∼1805)이다.

1778년 사은사를 따라 청나라에 다녀온 뒤 그곳에서 견문한 것을 묶어서 펴낸 ‘북학의(北學議)’에서였다.

당시 20대 후반이었던 그의 글엔 선진국인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에 감탄하며, 뒤처진 조선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는 젊은 선각자의 고뇌가 절절히 배어 있다.

박제가가 기록한 조선의 낙후함은 지금으로선 얼른 믿어지지 않는다. 청나라엔 수레가 이동 및 운반수단으로 보편화됐지만 조선은 제대로 된 수레 하나 만들지 못했다. 또 목재를 정밀하게 다듬지 못해 배(船)에 물이나 빗물이 새어드는 것조차 막지 못했다. 심지어 그릇을 만들 때 밑에 모래알이 붙은 채 구워내 밥알이 더덕더덕 말라붙어 있는 것 같고, 이를 끌어당기면 밥상과 탁자에 흠집이 생길 정도라고 그는 기록했다.

그가 된장을 그리 폄훼한 것은 불결하기 짝이 없는 제조 과정 때문이었다. 메주를 만들 때 모래나 벌레, 발톱, 머리카락 등이 들어가는 일이 잦아 “체로 걸러낸 뒤에야 그 더러운 것을 먹을 수 있다”고 그는 한탄했다. 조선이 융성했던 정조 시대의 생활상인데도 그랬다.

우리 겨레는 흰옷을 즐겨 입은 것과는 달리 먹고 마시는 것의 위생 문제에선 현대화가 진행되기 전까지 오래도록 고통을 받았던 것 같다.

독립신문은 1897년 9월 2일자 사설에서 “서울 안에 있는 우물 100분의 99는 모두 개천하고 속으로 통하여 개천 물이 땅 틈으로 스며드니, 대개 지금 서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먹는 물은 대소변을 거른 물이 섞인 물을 먹는 것”이라고 개탄하며 식수 위생에 대한 한성부의 관심을 촉구했다.

최근 세계적인 금융위기로 경제가 어렵다곤 해도 역사상 가장 번영한 시대를 열어가고 있는 요즘의 기준으론 정말 격세지감이 드는 얘기다.

중국발 멜라민 파동을 지켜보며 박제가를 떠올려본다. 그가 다시 살아난다면 우리의 식품 위생 수준이 이젠 중국보다 나은 것에 흡족해할까. 상상해보건대 어쩌면 그는 미국 유럽 등을 둘러보고 ‘서학의(西學議)’라는 책을 쓰면서 아직 선진국 수준엔 이르지 못한 한국의 식품 위생에 한숨을 쉴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 많은 주부가 도대체 식탁에 뭘 올려야 할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는 ‘식란(食亂)’을 보고 혼자 해보는 생각이다.

중국이 초고속 성장에만 매달려 식품 위생을 등한시하다 멜라민 파동을 일으킨 것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부끄럽지만 한국에서도 먹는 걸 가지고 장난치는 악덕 장사치들이 근절됐다고 보기 어렵다.

미국산 쇠고기를 둘러싼 광우병 파동에 이어 터진 멜라민 파동은 이명박 정부에 먹고 마시는 것의 안전성 보장이라는 과제를 안겼다. 정부가 7일 발표한 100대 국정과제에 ‘깨끗한 물, 공기와 안전한 먹을거리 보장’을 포함시킨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국민이 누구나 안심하고 물과 음식을 먹을 수 있게 관리, 감독하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책무다. 그것만 잘해도 역대 정권이 성공하지 못했던 분야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다.

한기흥 정치부장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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