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성호]오바마, 미국 민주주의의 힘

  • 입력 2008년 9월 1일 02시 59분


지난달 28일 버락 오바마가 미국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그는 미국 주요 정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최초의 흑인이다. 건국의 아버지 상당수가 노예주였던 나라의 지도자, 노예제를 지키자고 내전도 불사했던 정당의 새 얼굴로 떠올랐다. 오바마는 누구이며, 그가 말하는 미국은 어떤 나라일까.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오바마의 인생역정은 잘 알려져 있다. 허나 오바마를 이해하는 데 있어 행적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어록이다. 그중에서도 나는 지난 3월 18일의 필라델피아 연설에 주목한다.

당시 오바마는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가 다니던 흑인교회의 담임목사, 자신의 정신적 지주로 널리 알려진 제러마이어 라이트가 인종차별을 비판하며 ‘저주받을 미국’이라는 극언을 한 것이다. 대권을 꿈꾸는 오바마의 정치자산이자 최대 취약점인 인종문제가 전면에 부각되는 순간이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자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오바마는 정면승부를 결심한다. 그리고 바로 제헌의 역사적 현장을 기리는 헌정기념관에서 건국의 원죄인 인종문제에 대해 토로한다. 역사에 남을 이 연설에서 오바마는 미국 민주주의의 정신을 제헌 이래 변함없는 헌법 전문(前文)에서 구한다.

‘완벽한 나라’ 아니라는 자성

“우리 합중국 국민은 더 완벽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이 헌법을 제정한다.”

이 짧은 구절로부터 오바마는 인종문제를 위시한 수많은 모순을 안고 출발한 미국이 ‘완벽한 나라’가 아니라는 미국인의 진솔한 자아비판을 읽어낸다. 동시에 그런 반성적 성찰 위에 서있기에 미국의 민주주의가 쉼 없이 진보해 왔음을 상기시킨다. ‘완벽한 나라’가 아니라는 솔직한 자성이 ‘더 완벽한 나라’로 가기 위한 ‘합중국 국민’ 모두의 행진을 추동해 왔다는 얘기다. 자신은 동의할 수 없지만 라이트의 실언도 진보를 위한 자성의 일환으로 보자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미국 민주주의의 힘을 본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자기교정으로 이겨내고 ‘더 완벽한 나라’를 만들어나가는 저력을 느낀다. 그 뚝심은 단순한 부국강병을 넘어 미국 민주주의가 추구해온 자유와 평등의 규범적 가치에서 비롯한다. 물론 위선과 탈선이라고 비난받아 마땅한 역사적 행보가 많았음도 잘 안다. 하지만 백인 노예주가 모여 제헌을 논의하던 자리에 서서 건국의 원죄를 속 깊게 보듬어 안는 흑인 오바마를 보며 바로 “만인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선언하던 미국 민주주의의 진보적 이상을 재확인한다.

대한민국을 만든 선각자들이 미국에 매혹된 이유 역시 시장이나 안보의 논리만은 아니었다. 구한말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나 일제강점기의 미국 망명객은 물론이다. 미국 땅에 발디뎌본 바 없는 백범마저도 독립 대한민국이 미국식 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택하기를 소원했던 이유가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대국굴기’나 ‘보통국가’ 따위를 국가대계라고 내세우는 강퍅한 이웃에 둘러싸인 우리의 미래가 미국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보편적 가치의 구현에 달려 있다는 신념이었다.

반면 이순(耳順)에 이른 대한민국, 작금의 친미는 ‘더 완벽한 나라’를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미국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시장과 안보를 앞장세운 ‘실용외교’는 진보하는 미국의 누구와 무슨 ‘가치’를 공유하며 ‘동맹’을 강화시킬 생각일까. ‘잃어버린 10년’ 담론에 기대어 안분하고 자족하는 사이, 정작 미국에서는 ‘실패한 8년’이 대선의 화두라는 사실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일까. 뒤탈도 많았던 지난 4월의 대통령 방미 중 유력 대선후보와의 회동이 없었던 소치가 이런 단견과 무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우려가 나만의 기우일까.

진정한 ‘가치동맹’ 필요한 때

그렇지만 지금 이 순간 우리의 얄팍한 외교역량이나 한탄하고 있을 수는 없다. 당장은 전 세계적인 축하의 대열에 동참할 때다. 물론 오바마가 인종의 마지막 벽을 넘어 백악관에까지 입성할지는 미지수다. 허나 11월의 승패와 무관하게 오바마의 도전은 이미 절반 이상의 성공을 거두었다. 스스로 드리운 세계제국의 그늘에 가려 있던 미국 민주주의의 힘을 다시 한 번 보여줬기 때문이다.

‘우리 합중국 국민’이 이뤄낸 위대한 승리, ‘우리 대한국민’이 보내는 아낌없는 갈채, 진정한 ‘가치동맹’의 시작이다.

김성호 연세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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