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신치영]美-러 갈등 ‘강건너 불’ 아니다

  • 입력 2008년 8월 28일 02시 57분


그루지야 사태로 촉발된 러시아와의 갈등이 미국을 큰 충격으로 몰아넣고 있다.

주변에서 만나는 미국인들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통 중국 이야기뿐이었지만 지금은 러시아로 관심이 옮겨 갔다. 송곳니를 드러낸 북극곰(러시아)이 날카로운 발톱을 사납게 휘두르는 삽화가 연일 미국 신문 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영토를 갖고 있던 옛 소련이 1991년 해체된 이후 미국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막강한 군사력, 세계 경제성장의 기관차 역할을 하는 경제력, 첨단 과학기술, 문화적 호소력 등으로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려왔다. 금과옥조로 여기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세계에 확산시키겠다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러시아의 태도는 그런 미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등이 온갖 압박에 나섰지만 러시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계는 옛 소련의 해체와 냉전 종식을 이끌어 낸 미국이 사태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미국의 모습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러시아와의 평화협정을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 이끌어 냈다는 점도 미국으로서는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사태 초기 미국의 반응이 러시아에 대한 분노였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소련 해체 이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를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려고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무력으로 맞서는 러시아를 용서할 수 없다는 게 주된 여론이었다. 오죽하면 존 매케인 공화당 대선 후보가 러시아를 주요 8개국(G8) 회의에서 축출하자고 주장했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격한 여론은 차츰 현실론으로 바뀌는 분위기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스트로브 탤벗 브루킹스연구소 소장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화내고 분노하는 것은 정책이 아니다. 지금 상황이 화가 나고 자존심 상하기에 충분하지만 냉정하게 정책과 전략을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여론 변화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대치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손익 계산이 깔려 있다. 러시아제 무기가 시리아 등 중동으로 흘러들어가 미국과 서방을 위협한다면? 러시아가 이란과 북한의 핵 프로그램을 억제하는 데 협조하지 않는다면? 아프가니스탄에서 러시아의 협력을 받지 못한다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거부권을 가진 러시아가 미국의 외교적 노력을 방해한다면?

미국으로서는 잃을 것이 너무 많다. 자칫 테러와의 전쟁, 마약과의 전쟁, 핵 확산 방지 노력 등이 한꺼번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다.

이번 그루지야 사태와 러시아의 부상은 한국에도 그저 강대국 간 파워게임이려니 하고 바라볼 수만은 없는 문제다.

만약 미국과 러시아의 갈등 관계가 증폭돼 신(新)냉전 시대가 본격화한다면 분단국이라는 냉전의 잔재를 안고 있는 한국은 최일선에서 그 여파를 감당해야 한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중국은 강력한 군사력에 경제력까지 갖춘 초강대국의 길을 걷고 있다. 역사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은 점점 증폭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유라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한다면 한반도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외교안보 당국자들은 그루지야 사태를 둘러싼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면밀하게 지켜보고 한반도에 미칠 영향을 깊이 있게 점검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신냉전에 대비한 장기적 안목의 외교 전략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신치영 뉴욕 특파원 higgled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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