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허영]‘늦장 개원’ 악습 뿌리뽑을 때

  • 입력 2008년 8월 28일 02시 57분


국회가 국회법을 어기고 시한을 83일이나 지나 상임위 구성을 마친 후 정상화됐다. 국회법은 제18대 국회가 6월 5일 열리도록 정하고 있다. 상임위원장도 6월 10일까지는 뽑아야 했다. 제18대 국회는 스스로 법을 지키지 않고 위법국회로 출발했다.

한 외국 주한대사는 우리 국회의 이런 늦장 개원과 원구성의 이유와 법률규정을 물어왔다. 참으로 곤혹스러운 문의였다. 국회 개원에 관한 국회법 규정을 사실대로 알렸다. 국회가 법을 어긴 것이라고 솔직히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외국대사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기 나라 헌법에는 총선 후 국회 개원일에 관한 규정이 있는데 한국 헌법에는 없느냐고도 물었다.

내친김에 우리 국회는 국회법뿐 아니라 헌법조차 무시하는 일을 매년 서슴없이 자행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알릴 수 없었다. 국회가 매년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까지 예산안을 심의 의결해야 한다는 헌법규정을 무시하는 일은 이제 연례행사가 됐다. 올해 정기국회도 역대 국회처럼 이 규정을 지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지켜볼 일이다.

헌법과 법률을 상습적으로 어기는 국회의원이 그야말로 깜도 되지 않는 대통령과 고위 공무원의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는 걸핏하면 탄핵 또는 국정조사 운운하며 큰소리치는 정치행태는 참으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법을 지켜야 하고 입법부는 법을 무시해도 좋다는 오만한 발상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가.

위법국회가 탄핵-國調 운운하나

합의 개원과 합의 원구성도 좋지만 합의를 위해서 법을 어기는 일은 입법정신에 반할 뿐 아니라 뒤늦은 합의로 위법사실이 치유되지 않는다.

우리 국회는 혁명적으로 개혁하지 않고서는 국민에게 스트레스만을 주고 국가 재정만 축내는 혹 같은 존재다. 일부 정치꾼을 제외하면 법조인이나 교수 등 나름대로 각 분야의 전문가가 모인 국회가 상습적으로 헌법과 법률을 어기면서 국민의 신뢰를 잃고 가장 후진적인 국가기관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의 지도부에 맹목적으로 끌려 다니는 패거리 근성을 버리고 헌법이 정한 대로 국가 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하는 자유위임의 정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당대의민주주의 국가에서 국회의원이 소속 정당의 결정에 따라야 하는 정당기속(政黨羈束)은 불가피하고 순기능도 있다. 그렇지만 정당기속의 당위성은 정당의 결정이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에 따라 이뤄지고 합법적일 때만 인정된다.

우리 정당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법을 어기더라도 정당 지도부가 정하는 방침에 따라 국회를 운영하고 소속 의원에게 불법도 따르도록 강요한다. 국회의원은 차기 선거의 정당공천에 발목이 잡혀 맹목적으로 추종한다. 헌법이 강조하는 국가 이익이나 양심 따위는 돌볼 겨를이 없어 보인다.

이런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국회 파행의 악순환은 이제 단호히 척결해야 한다. 정당 지도부부터 의식구조를 완전히 바꿔야 한다. 특히 국회 다수당과 제1야당의 지도부는 이제부터라도 헌법과 법률을 철저히 준수하겠다는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 그리고 국민에게 엄숙하게 약속해야 한다.

당내 일부 강경파에게 짓눌려 필요 이상의 큰 목소리를 내는 일도, 정치색 짙은 억지주장을 하면서 법을 어기는 일도 없을 것임을 다짐해야 한다.

지도부 의식개혁-법적 장치 시급

국회가 다시는 지각 원 구성 같은 위법을 하지 못하도록 법적 제도적인 장치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국회 개원이 더는 정치적 협상대상이 될 수 없도록 국회법에서 큰 틀을 정할 필요가 있다. 국회의장과 부의장을 비롯해서 상임위 위원장의 선출은 원내 교섭단체 세력분포 비율에 따르도록 정하면 된다.

의원내각제 국가에서는 원내 다수당인 여당이 모든 상임위 위원장을 맡는 것이 상식이다. 의원내각제적 요소가 가미된 대통령제인 우리도 그런 방향이 옳다고 생각한다. 여대야소 때나 여소야대 때나 나름의 순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여당 대표의원이 언급한 무노동 무임금의 원칙도 좋지만 국회법이 정하는 개원일을 지킬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이 훨씬 급선무다.

허영 헌법재판연구소 이사장 ·전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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