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민현식]선열의 우리 글 사랑 되새기자

  • 입력 2008년 8월 19일 03시 01분


건국 60주년 기념 ‘국어사랑 큰잔치’에 부쳐

광복과 건국의 역사적 순간과 함께 우리 말글의 광복과 부활의 체험도 기억해야 한다.

일제는 처음부터 일본어를 국어로 강요하더니 193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어 수업을 없앴다. 우리는 징병, 징용, 정신대로 끌려가고 창씨개명을 강요당해 민족의 미래가 암담했고 문인은 다락에서 몰래 글을 써야 했으며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강제 폐간을 당했다.

주시경 선생은 일찍이 국어 연구에 일생을 바쳐 서울의 여러 학교에서 매주 꽉 찬 수업 시간을 통해 자주독립과 국어의 중요성을 일깨우다 과로로 1914년 38세에 순국했다.

제자들은 스승의 뜻을 잇고자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로 개명, 오늘의 한글학회)를 결성해 1926년부터 한글날을 기념했다. 또 국어사전이 없음을 통탄히 여기고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해 4년간 125차 회의 끝에 한글맞춤법통일안(1933년)을 만들었는데 동아일보 김성수(金性洙) 사장의 후원이 컸다.

1942년에는 사전 원고를 탈고했는데 일제는 함흥 영생여고의 여학생들이 통학 기차에서 조선말 하는 것을 트집 잡아 조선말 사용을 권장한 정태진 선생을 체포하여 고문하고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결국 사전 원고를 압수하고 그가 속한 조선어학회 회원 30여 명을 함경도 홍원경찰서로 압송해 혹독하게 고문했다. 이윤재 한징 선생은 옥사했지만 이희승 최현배 정인승 선생은 함흥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광복을 맞았으니 많은 문인이 변절하던 시절 국어학자들은 지조를 지키며 옥중 고난을 감내하였다.

광복 후 우리는 문맹이 70%를 넘었고 청소년은 일본어만 배워서 한글 맞춤법에 따라 쓰는 법을 몰랐다.

이 참담한 현실에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국어강습회를 전국에 열고 맞춤법 강습을 했다.

사전 원고는 서울역 창고에서 찾아 록펠러재단의 지원으로 1947년부터 6·25전쟁 전까지 1∼3권을, 1957년까지 전 6권을 완간했으니 국어사전 제작에 고난의 가시밭길 30년이 걸렸다.

건국 후에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공용문서는 한글로 쓴다.

다만 얼마 동안 필요한 때에는 한자를 병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한글 전용에 관한 법률(법률 제6호)을 공포했다. 이는 많은 한시를 남길 정도로 한문에 정통했지만 한글 전용 의식이 강했던 이승만 대통령의 의지에 기인한다.

그는 한글 전용의 혼란을 우려하여 국한혼용체도 쓰게 했다. 배재학당에서 영어를 1년 만에 익혀 학생을 가르치는 영어 교사가 될 정도로 어학에도 뛰어나 20대에 반역죄로 모함 받아 옥중에 6년을 있으면서는 죄수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인 최초로 영한사전을 집필했다.

또 영어가 뛰어나 30세에 민영환의 밀서를 갖고 1904년 미국 대통령을 만나러 갔는데 결과가 실망스러웠으나 미국의 신학문과 민주주의를 익히고자 조지워싱턴대 학사, 하버드대 석사, 프린스턴대 박사를 5년 만에 마쳐 미국인도 어려운 학력을 동양인 최초로 갖고 미국인의 존경을 받아 장차 상하이 임시정부의 국제외교를 담당하는 토대를 닦았다.

조선어학회 회원의 희생과 건국 대통령의 한글 사랑의 이상이 어우러져 우리의 국어정책 골격이 지금껏 이어져 왔다.

그런데 요즘은 우리 말글을 피로써 지켜온 선열의 역사와 그분들이 만든 맞춤법과 국문법의 철학과 이상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국어를 오염시키고 어지럽게 사용하며, 영문법은 알고 국문법은 모르는 세태를 만들고 있다.

22일부터 이틀간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국어원이 주최하는 ‘건국 60주년 국어사랑 큰잔치’가 열린다. 선열의 국어사랑 정신을 되돌아보고 실천을 다짐하는 자리가 되기를 기원한다.

민현식 서울대 교수 국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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