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천광암]韓美日, 같은 반 친구라면

  • 입력 2008년 8월 7일 03시 01분


유력한 차기 일본 총리 후보인 아소 다로(麻生太郞) 자민당 간사장은 소문난 만화 마니아다. 고이즈미 정권과 아베 정권에서 외상을 지낸 그는 지난해 6월 출간한 저서에서 어려운 외교 문제를 소년만화처럼 쉬운 비유를 들어 설명한 적이 있다.

교실에서 발언권이 가장 센 학생은 싸움을 잘하는 A 군(미국)이다. B 군(프랑스 중국 러시아 등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은 완력이 A 군에 못 미치지만 공부를 잘해 나름대로 발언권이 있다. C 군(일본)은 돈이 많지만 완력과 발언권은 없다.

아소 간사장은 묻는다.

‘C 군이 (이지메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그는 “‘A 군과 사이좋게 지내기’라는 게 어린아이도 아는 생활의 지혜”라고 자답(自答)한다.

그의 비유는 이런 수준에서 끝을 맺지만 내친김에 이야기를 더 진전시켜 보자.

아소 간사장은 C 군이 이지메의 잠재적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옆자리에 앉은 D 군(한국)을 괴롭힌 전력이 있는 가해자다. 그런데도 C 군에 대한 교실 안의 평판은 나쁘지 않다. 2006년 영국 BBC가 33개국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일본이 ‘세계에 좋은 영향을 끼친 나라’ 1위로 꼽힌 것이 단적인 예다.

D 군에게는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원래 돈에 약한 게 세상인심이다. 일본은 경제가 고도성장 궤도에 오르자 공적개발원조(ODA)를 통해 세계 곳곳에 엄청난 돈을 뿌렸다. 일본이 1954∼2003년 185개국에 제공한 ODA 자금은 한국이 지난해 개발도상국 원조를 위해 쓴 돈의 931배인 224조 원에 이른다.

인심을 얻은 C 군의 마음속에는 발언권을 향한 야심도 꿈틀거렸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돼야겠다고 작심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반대, 아프리카의 비협조 탓에 일단 실패로 돌아갔지만 일본의 노력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5월 아프리카 50개국 정상을 요코하마(橫濱)로 초청해 “아프리카에 대한 ODA를 2배로 늘리겠다”고 약속한 것도 이를 위한 ‘표밭 다지기’였다.

한국이 독도 문제를 놓고 무한 외교전을 벌여야 하는 상대인 일본은 이처럼 돈도 많고 교실 내 평판도 좋은 데다 이젠 부반장까지 넘보는 C 군이다. ‘남들도 나처럼 C 군을 불량학생 취급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한 D 군에게는 앞으로 뒤통수 맞을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국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는 일본의 외교 도발을 막아낼 수 없다. 전략과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

우선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를 늘려야 한다. ‘무임 승차국’ 이미지를 떨쳐내지 못하면 아무리 진실이 한국에 있어도 편들어 줄 나라가 많지 않다. 다만 한일 간의 ODA 격차를 줄이는 데는 긴 세월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만이 거의 유일한 외교적 해법이다. 아소 간사장은 “A 군의 말 한마디면 C 군은 이지메의 대상이 된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C 군은 자기보다 경제력, 발언력, 완력이 모두 약하면서 고분고분하게 굴지도 않는 D 군을 이지메로 만들고픈 충동을 언제 느낄까. D 군과 A 군 사이가 나쁠 때다. 일본에서는 ‘어린아이도 아는 생활의 지혜’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초 일본 언론과 회견하면서 현직인 후쿠다 야스오 총리의 이름은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지만 ‘친구 고이즈미’는 4번이나 들먹였다고 한다. 만약 미국의 독도 영유권 표기 소동이 고이즈미 정권 시절 일어났다면 부시 대통령이 이번처럼 신속하게 수정을 지시했을까. 상상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천광암 도쿄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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