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탁환]독도를 ‘리앙쿠르’라 부르지 말라

  • 입력 2008년 7월 31일 02시 55분


답사를 다니다 보면 이야기가 유독 집중된 공간과 만난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보스니아의 작은 도시 비셰그라드에 놓인 ‘드리나 강의 다리’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문화의 만남과 충돌 그리고 화해와 사랑을 그렸다.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애용한 공간은 우물이다. 말라버린 우물로 내려간 하루키의 주인공은 뼈아픈 역사를 만나며 때론 신비스러운 체험 속에서 상처를 위로받는다.

섬 역시 이야기가 차고 넘치는 공간이다. 제주도의 다양하고 멋진 신화를 읽어보라. 제주도 신을 따라 천상과 지상을 누비다 보면 그리스 로마 신화가 부럽지 않다.

독도에 관한 이야기 역시 적지 않다. 먼저 우산국의 슬픈 운명이 눈길을 끈다. 모진 바다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한 섬나라 우산국 백성은 사납고 용맹하여 신라의 정예병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증왕 13년(512년) 신라 장수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에 나섰을 때도 힘으로 누르지는 못했고, 꾀를 내어 나무로 만든 가짜 사자를 앞세워 항복을 받아냈을 따름이다. 그 후로도 우산국은 멸망하지 않고 신라와 고려의 속국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1500년 넘게 이어진 우산국 역사

‘고려사’를 살피면 현종 9년(1018년) 동북 여진의 노략질을 피해 뭍으로 나왔던 우산국 백성을 그 다음 해 섬나라로 돌려보냈고, 현종 13년(1022년)에야 우산국 백성을 예주(禮州)에 영원히 살게 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사부에 점령당한 후 500년 동안 이 작은 섬나라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통일신라에서 후삼국을 거쳐 고려가 새 나라를 여는 혼란기에 우산국은 무엇을 얻고 잃었을까. 장편소설 한 권은 나올 법하다.

안용복과 김옥균 그리고 홍순칠도 독도를 위해 값진 일을 했다. 안용복과 홍순칠의 이야기는 동화책과 위인전으로 출간됐지만 고종 20년(1883년) 동남제도 개척사(東南諸島 開拓使)가 된 김옥균의 활약은 주목받지 못했다. 풍운아 김옥균은 울릉도와 독도로 옮기기를 희망하는 백성을 모집해 그해 4월부터 국가 차원에서 벌인 이주 업무를 총괄했고, 같은 해 9월에는 울릉도에 불법으로 건너와서 살던 일본인을 돌려보냈다. 1905년 시마네 현이 독도를 다케시마로 칭하기 22년 전의 일이다.

이야기가 흘러넘치니 희극도 한두 장면 있을 법하다. 미국 지명위원회(BGN)가 독도를 30년 전부터 ‘리앙쿠르 록스(Liancourt Rocks)’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우기는 일본 정부만큼이나 코미디다. 리앙쿠르란 무엇인가. 1847년 10월 25일 만들어진 361t급 프랑스 포경선이다. 1849년(철종 즉위년) 리앙쿠르호는 고래를 잡기 위해 동해로 접어들었고 1월 27일 선장 장 로페즈는 아름다운 바위섬을 발견했다. 보고를 받은 프랑스 해군성은 1851년 발간된 ‘수로지’ 제4권에 리앙쿠르라고 이름 붙여 실었다.

식민지 개척에 열을 올리던 유럽 열강은 19세기 내내 일확천금을 꿈꾸며 아시아와 아프리카 혹은 아메리카로 떠났다. 새 항로에서 발견한 섬이나 강 혹은 숲에 멋대로 이름을 만들어 붙였다. 섬 하나를 놓고 서로 다른 이름이 등장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프랑스에서 독도는 리앙쿠르지만, 러시아에서는 독도의 서도는 올리부차(1854년) 동도는 메넬라이(1854년)라고 불렸고, 영국에서는 호닛(1855년)으로 통했다.

19세기 제국주의가 더럽힌 이름

제국주의자들은 그들의 항해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아시아와 아프리카 혹은 아메리카에서 대대손손 살아온 이들이 부여한 이름을 무시했다. 이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 섬과 강과 숲에 대한 권리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적 도발이다. 독도를 리앙쿠르로 명명한 일은 낡은 제국주의의 잔재이며 아시아와 우리네 역사에 대한 무지를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다.

우리가 유럽이나 미국의 크고 작은 섬에 함부로 이름을 붙이지 않듯이 독도를 고래잡이배의 이름 따위로 더럽힐 권한이 없다. 그 이름에 프랑스의 선점권을 인정하는 것이 국제적 관행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지 일깨우고 논쟁해야 한다. 코미디가 심각한 현실이 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김탁환 소설가·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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