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성한]北核, 냉각탑 폭파해도 산 넘어 산

  • 입력 2008년 6월 25일 02시 58분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2년 1월 연두교서에서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명명한 이라크, 이란, 북한에 대한 정책은 6년이 지난 현재 제각기 특이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라크는 미군 증파 전략과 이라크군 훈련 등이 효과를 거두면서 가까스로 안정화 작전의 ‘성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으나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사담 후세인 정권의 몰락으로 중동의 ‘패권국’으로 등장한 이란은 더 대담하게 핵 프로그램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핵실험 직후 최악의 상태까지 갔던 북한 핵문제는 2·13합의와 10·3합의를 거쳐 핵시설 ‘불능화’와 핵 프로그램 ‘신고’를 하는 단계에까지 도달했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 신고서를 제출하면 미국은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삭제하고, 뒤이어 북한은 영변 원자로 냉각탑을 폭파시키는 ‘쇼’를 연출할 것이다. 이후 6자회담이 재개되고, 6자 외교장관 회담이 열릴 것이며, 북한의 신고 사항에 대한 ‘검증’ 문제와 핵 폐기 단계로 진입하기 위한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테러지원국 명단과 적성국교역법 적용 대상에서 북한을 삭제하는 ‘상징적인’ 조치를 해주는 대가로 북한이 더는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없도록 한 것은 꽤 괜찮은 협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이런 성과를 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라크와 이란에서 외교적 성공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북한이 상대적으로 쉬운 사례로 떠오른 점, 북핵문제의 기술적 측면과 정치적 요소를 함께 고려하는 크리스토퍼 힐 차관보의 협상력, 그리고 ‘진보정권 10년’과의 대북정책 차별화를 강조하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그동안 남북관계를 통해 경제적 실리를 챙기던 북한이 할 수 없이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거래’를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게임’은 이제부터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 즉 5MW 실험용 원자로, 재처리 공장, 핵연료봉 제조시설을 불능화하는 대가로 100만 t 상당의 경제·에너지·인도적 지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2007년 2·13합의문 제4항에 따르면 북한은 ‘기존의 모든 핵시설(all existing nuclear facilities)’을 불능화하게 돼 있다.

북한이 2006년 10월의 핵실험 장소를 지금껏 공개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볼 때 핵무기를 제조한 곳도 영변 핵시설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 검증과 관련해 대북제재 해제의 실질적 키를 쥐고 있는 미 의회 내 반발도 만만치 않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이런 워싱턴 내의 미묘한 분위기를 의식해 18일 헤리티지재단 연설에서 “테러지원국 해제 후 45일간 북한의 협력 수준이 불충분하다고 판단되면 적절한 대응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핵문제의 ‘관리’가 아니라 ‘해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우리 정부로서는 6자회담을 통한 철저한 검증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검증의 시기·대상·방법을 정하는 데 일조해야 한다. 8월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나면 사실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부시 행정부가 검증이 완료되기도 전에 북-미관계 정상화 조치를 취할 것 같지는 않지만, 미국이 너무 속도를 내지 않도록 한미일 3각 공조를 철저히 해야 한다.

정부는 북한의 냉각탑 폭파를 마치 핵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치부해 대북정책을 수정하라는 국내적 요구가 있을 경우 이에 의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물론 ‘비핵·개방 3000’은 북한의 비핵화까지 아무것도 안 한다는 것은 아니므로 신고와 불능화 조치가 이루어지게 되면 북한에 대화를 제기하고 실질적 남북관계 발전을 위한 구체적 논의를 할 준비가 돼 있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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