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철희]정부는 민심을, 시민은 세계를 읽자

  • 입력 2008년 6월 20일 03시 01분


집권 4개월도 채 안 된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이 10%대다. 거리는 촛불을 든 시민들로 가득하고, 노동자들은 파업 중이다. 고유가, 고환율, 고물가 시대가 한국 경제를 안팎으로 뒤흔드는데 정부의 리더십은 보이지 않는다.

국민의 이익을 지켜야 할 관료들은 윗사람 눈치를 보느라 복지부동(伏地不動)하고, 민의를 대변해야 할 국회는 제대로 열리지조차 않고 있다. 국정을 책임져야 할 여당은 집안싸움에 겨를이 없고, 야당은 성난 민심에 편승하려고만 한다. 정당정치 대의정치는 사라졌고, ‘길거리 민주주의’만 무성하다. 삶의 터전이 흔들리는 서민들은 촛불을 들 여유조차 없는데, 정치투쟁을 벌이자고 판을 벌이는 이들도 있다. 서로 책임 전가만 하는 정부와 나라야 어찌 되건 자기 목청만 높이는 시민들이 정면으로 맞부딪치면서 ‘무책임의 체계’가 공전(空轉)하고 있다. 그러는 동안에 국격(國格)은 떨어지고, 민생은 불안하고, 나라의 장래는 암담하다.

왜 이리 되었느냐고 물으면 이유는 수없이 많다. 하지만 그 본질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데 있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 ‘KY’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한다. ‘구키오 요메나이(분위기를 못 읽는다)’라는 일본말을 영어 이니셜로 줄인 말이다. 한국에도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서민에 자녀교육-내집 꿈 줘야

한국의 보수 지도층은 서민들의 정서를 제대로 못 읽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을 통해 성장한 국민의 분노를 관료적 수사로 얼렁뚱땅 삭이려고 한다면 국민의 민도와 눈높이를 너무나도 모르는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반대하는 이는 적지만, 미국에 모든 것을 먼저 알아서 내주는 졸속한 협상을 지지하는 이는 없다. 동맹이나 안보 등도 회복해야 할 중요한 가치이지만, 삶의 안정, 가족의 건강과 행복 등 ‘생활정치’의 개선을 바라는 게 지금의 국민이다.

1970년대식 건설입국을 통한 고도성장보다는 물가 안정과 복지의 충실화가 염원이다. 서민들은 자기 자식이 남들과 비슷한 여건에서 공평하게 교육받고 안정된 직장을 찾아 열심히 일하면 작더라도 내 집 하나 마련할 수 있는 꿈을 꿀 수 있는 사회이길 바란다. 국민들 사고방식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다는 걸 읽어야 보수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진보와 싸우는 보수가 아니라, 진보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개혁하는 보수’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성난 시민들은 정당한 자기주장과 소모적 정치 투쟁을 구분해야 한다. 쇠고기 문제에 대해 안심과 신뢰를 주지 못한 정부가 소통마저 안 되니 거리로 뛰쳐나오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한미 쇠고기 문제와 관련해 재협상만 해결책으로 고집하면, 국가신인도도 저하되고 재협상 와중에 오히려 덤터기 쓸 공산이 크다. 국민 건강을 담보할 실질적 조치가 확보되는지 지켜보는 게 현실적이다. 국민이 뽑아 5년 임기가 보장된 대통령을 반년도 안 돼 퇴진하라는 이야기는 딴죽걸기요, 흠집 내기다. 시민들의 정당한 요구와 정치투쟁은 구분되어야 한다. 정치는 새로 개원하는 18대 국회에 일단 맡겨줘야 한다. 정치인들을 통째로 신뢰하지 않는 것은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자기 부정이다.

노조와 파업 주도 세력은 바깥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읽을 필요가 있다. 유가가 너무 올라 힘든 것은 한국만이 아니다. 세계경제 전체가 출렁대고 있다. 못살겠다고 한탄만 할 게 아니라, 자원이 없는 한국이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서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

노조도 세계 자원위기 고민을

노동자의 생존권은 보장되어야 하지만, 파업이 일상화된 위협이 되면 안 된다. 국가경제의 70% 정도를 무역에 의존하는 국가에서 물류대란으로 수출에 지장을 초래하면 결국 피해는 부메랑처럼 나라 전체에 되돌아온다.

공기업 민영화, 언론 개혁, 교육 개혁 등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이 입맛에 안 맞는다고 거리에 나서 저항하기보다는, 더 나은 개선책과 개혁의 대안을 제시하는 게 용기 있는 자세다.

정부는 안을 들여다보면서 민심을 제대로 읽고, 시민사회는 밖을 내다보면서 세계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 그래야 무책임의 체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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