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배극인]‘인터넷 그늘’에 기업이 우는 나라

  • 입력 2008년 5월 13일 02시 59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화병이 날 지경입니다.”

한 대기업 홍보책임자인 A 씨는 최근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군소 잡지 간부라는 사람의 전화를 받았다. “회사를 둘러싼 안 좋은 소문을 기사화할 생각인데 협상할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A 씨는 당초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주요 포털과 제휴했으니 인터넷에 쫙 퍼뜨리겠다”는 협박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협상’을 택했다. 진위(眞僞)에 관계없이 포털에 기사가 올라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낯익은 장면이 되풀이됐다. 우선 이 매체에 기사를 싣지 않는 조건으로 300만 원을 광고비 명목으로 건넸다. 다음 날부터 비슷한 부류의 매체에서 돌아가면서 같은 내용의 전화를 걸어왔고 그때마다 적게는 300만 원, 많게는 500만 원씩을 뜯겼다.

웬만한 기업의 홍보담당 임직원들은 이와 비슷한 경험이 몇 번씩은 있다. 특히 포털 등 인터넷의 확산은 기업을 협박해 금품이나 향응을 요구하는 악덕 소비자(블랙 컨슈머)나 사이비 언론의 횡포를 부채질했다. 재계 관계자들은 “왜곡된 내용이라도 일단 인터넷에 뜨면 피해가 커진다”면서 ‘인터넷의 부작용’을 하소연한다. ▶본보 12일자 10면 참조

지난달 말에는 고의로 식품에 이물질을 넣은 후 “소비자 단체나 언론, 인터넷에 공개하겠다”고 기업을 협박해 돈을 뜯은 대학 시간강사가 구속됐다. 사이비 매체들이 기업에서 특히 민감하게 여기는 총수 관련 문제 등을 중심으로 ‘카더라’ 수준의 기사로 뒷거래를 시도하는 일은 재계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런 악순환은 결국 기업 경쟁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경제계에서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어설픈 이념과 독선(獨善)에 치우쳐 메이저 신문 탄압에 나서는 대신 인터넷을 악용한 사이비 언론의 폐해를 없애는 방향으로 언론정책을 폈다면 기업인 등 많은 국민으로부터 전폭적 지지를 받았을 것”이라는 말도 나온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려면 하드웨어뿐 아니라 소프트웨어 개혁도 함께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 인터넷의 맹점을 악용해 기업을 괴롭히는 블랙 컨슈머나 사이비 언론의 ‘그늘’은 이미 위험수위를 넘어섰다. 지금이라도 정부 당국은 물론 사회 전체가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함께 대처할 때다.

배극인 산업부 bae215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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