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홍찬식]조공(朝貢)

  • 입력 2008년 4월 21일 02시 54분


한국 천주교 역사상 최대의 순교 사건은 1866년 병인박해였다. 신도 8000명 이상이 희생됐고 조선에 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가운데 9명이 처형됐다. 프랑스 정부는 격분했다. 조선을 제쳐 두고 청나라 정부에 달려가 “중국이 책임을 지라”고 강하게 요구했다. 중국이 조선을 속국으로 두고 있다고 보고 종주국에 항의한 것이다. 이때 청나라가 내놓은 답변은 우리 역사에 큰 획을 긋는다. “조선은 청나라 속국이지만 내치(內治)와 외교는 자주적으로 해왔다. 청나라가 책임질 일이 아니다.”

▷우리는 대대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중국 스스로도 중화(中華)를 내세웠다.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황제는 하늘의 아들인 천자(天子)였고 중국은 나라가 아닌 천하(天下)로 불렸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인접한 초강대국 중국과의 관계가 원활하지 않으면 국가 생존이 어려웠다. 그러다가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중화 질서에서 벗어나 세계 질서 속에 본격 편입된다.

▷중국의 답변은 한중 관계의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선은 중국을 섬기며 조공을 바치는 나라로 되어 있었으나 내용적으로는 상호 실리를 얻기 위해서였다. 중국은 주변 국가들을 관리하면서 국내적으로 천자의 권위를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은 주종(主從)관계를 인정해 주면서 안전을 보장받았다. 조공의 실체는 오히려 조선이 이익을 챙겼던 국가 간 무역이었다. 우리는 1년에 4, 5차례씩 조공 사절을 보내 특산물을 교환하고 중국의 앞선 문물을 수입하는 창구로 활용했다.

▷통합민주당이 최근 타결된 한미 쇠고기 협상에 대해 “협상이 아니라 조공”이라고 공격하고 나섰다. 미국에 주기만 하고 받은 게 없다는 뜻에서 조공이라는 말을 택했다면 적절한 어휘가 아니다. 조공 이외에 새로운 왕이 탄생할 때마다 중국으로부터 ‘인가’를 받는 책봉까지 감수했던 조선이지만 외교는 약소국이면서도 500년 이상 국가를 유지했을 만큼 실용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외교의 성패를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재단하는 것은 섣부르다. 이번 협상이 득이 될지, 굴욕이 될지는 앞으로 우리가 얼마나 미국으로부터 실익을 챙기느냐에 달려 있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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