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오명철]자식을 놓아야 부모가 산다

  • 입력 2008년 1월 10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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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장. 웨딩마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신부의 아버지가 면사포를 쓴 딸을 데리고 입장한다. 신부를 신랑에게 인계한 아버지는 사위의 등을 두드리며 “잘 부탁하네”라는 당부를 남기고 아내에게 달려가 손을 잡고 식장을 나선다. 대기시켜 둔 스포츠카에 올라탄 부부는 단둘이 저녁노을이 가득한 바닷가 도로를 달리며 진정한 자유를 만끽한다. ‘50세 이후의 자유’를 내세운 한 생명보험 회사의 CF다. 아비 노릇하기가 점점 힘들어져서 그런가, 볼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든다.

끝없는 희생으로 평생 고통받아

아들이 사업을 하다 진 빚 때문에 자리에서 물러난 명문 사립대 총장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이가 적지 않다. 아버지가 평생 쌓아올린 공든 탑이 자식으로 인해 송두리째 무너지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어디 그 대학 총장뿐이랴. 겉보기에는 무탈해 보여도 자식들로 인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고 있는 부모가 적지 않다.

집을 넓혀 달라는 40대 아들과 며느리의 성화로 아파트 평수를 줄인 부모가 있고, 자녀들 결혼시킬 때마다 더 먼 변두리로 이사 간 부부도 있다. 자식의 빚 때문에 늘그막에 단칸 전세방을 전전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연금마저 차압당한 이도 있다. 뼈 빠지게 교육시키고 직장까지 얻게 해 결혼까지 시켜 주었지만 철딱서니 없는 자식들은 끝까지 부모의 애프터서비스를 요구한다. 자녀들이 태어나 부모에게 준 기쁨은 잠시뿐, 그 대가는 길고 혹독하다.

지난해 발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6 전국가족보건복지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부모 열 명 중 아홉 명가량이 자녀가 대학을 졸업하거나 혼인 취업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자녀 양육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녀가 있는 1만117가구를 대상으로 양육 책임 시기를 조사한 결과, ‘대학 졸업 때까지’라는 응답이 46.3%에 달했다. 이어 ‘혼인할 때까지’가 27.0%, ‘취업할 때까지’가 11.9%로 뒤를 이었다. 평생 자녀를 책임지겠다는 의미인 ‘언제(까지)라도’는 5.5%였다. 선진국 평균인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는 8.6%에 불과했다. 자녀들에 대한 한국 부모들의 남다른 집착과 희생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수치다.

6·25전쟁 전후 태어난 한국의 베이비 부머 세대인 현재의 50대는 우리 사회에서 ‘효(孝)를 행한 마지막 세대요, 효를 받지 못하는 최초의 세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수명이 늘어나고 직장에서 밀려나는 속도가 빨라지면서 대부분 수입이 없는 노후 30년을 맞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세대는 너 나 할 것 없이 언제 어떻게 아름답게 자녀들을 ‘놓아 버릴’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세상에서 가장 악성 보험은 자식’이라는 영국 속담도 있지 않은가.

고통분담 통해 독립심 심어줘야

주변에 지혜롭게 자녀들을 독립시킬 준비를 하는 이들이 있다. ‘자식들에게 도리는 하되 희생은 하지 않겠다’고 작심한 뒤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이들은 우선 집안의 재정상태와 월수입에 대한 정확한 실태를 자녀들에게 설명해 준다. 부모가 자식들 몰래 끙끙거리면서 무리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부부의 결속과 협조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한다.

대학을 마칠 때까지 학비는 대 주고 먹고 자는 것은 해결해 줄 테니 그 이외의 것은 알아서 해결하라고 통보한 부부도 있다. 성인 자녀의 독립심 고취를 위해 방 청소와 빨래를 해 주지 않는 경우도 봤다. “한국의 모든 부모가 더는 망설이지 말고 ‘지금 당장’ 자식에게 들이는 돈을 절반 이하로 줄여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외치는 이코노미스트도 만났다. 얼마 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 회원국 중 한국만 유일하게 부모의 소득이 높을수록 자녀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난다’는 연구결과가 나온 것도 한국 부모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이유다.

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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