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미경]워커홀릭과 가족 친화 경영

  • 입력 2007년 10월 24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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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가면 가족과 대화할 힘도 없었다. 업무 스트레스가 거의 한계점에 도달했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오히려 ‘내 일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녔다.”

1990년대 말 닐 루덴스타인 당시 미국 하버드대 총장은 2개월간 휴직을 신청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 엘리트 조직의 리더가 너무 지쳤다는 이유로 잠시 일을 쉬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휴직이라는 구조신호를 보내기 전 그는 주당 74시간을 일했다. 주말을 제외할 경우 하루 15시간꼴이었다.

요즘 ‘익스트림(극한) 스포츠’가 인기를 끌고 있지만 일에서도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하루 13, 14시간씩 일에 에너지를 쏟아 붓고 ‘월화수목금금금’식의 근무환경에서 일하는 직장인이 의외로 많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주당 근로시간이 54시간을 넘은 사람은 전체 근로자의 35%에 이른다. 비공식 야근과 잔업, 회사 일을 퇴근 후 집에 가져와서 하는 경우까지 합치면 전체 근로자의 절반 정도가 하루 10∼12시간씩 일에 매달려 있는 셈이다.

이는 비단 우리만의 현상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주당 근로시간은 1990년대 초 43시간까지 떨어졌다가 1990년대 말 47시간으로 오르더니 2000년대 들어 50시간대를 육박하고 있다.

근무시간 증가는 노동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인터넷의 영향이 크다. 인터넷은 과거 생각할 수 없었던 업무 영역까지 만들어 내면서 업무량 증가를 몰고 왔다.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오히려 근무시간 증가를 즐기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워커홀릭족’이 늘어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실비아 앤 휼렛(경제학) 컬럼비아대 교수는 최근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낸 ‘70시간 업무의 위험한 유혹’이라는 보고서에서 ‘극한 스포츠’처럼 ‘극한 업무’도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중독은 언젠가는 깨어나기 마련이다. 육아와 가사의 의무를 진 여성 중 상당수는 늘어나는 근무시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급증하고 있지만 기업이나 정부기관에서 고위직까지 오르는 여성의 비율이 답보 상태인 것은 근로시간 증가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늘어난 근로시간만큼 성과가 나지 않는 것도 문제다. 23일 LG경제연구원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인의 근로시간은 OECD 30개 회원국 중 1위를 달리고 있지만 노동생산성은 23위에 불과하다.

근로시간 증가만큼 생산성이 높으면서도 스트레스는 덜 받는 일터를 만드는 것은 모든 조직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다.

얼마 전 취재차 만난 재미 사업가도 이 문제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대형 포장전문 회사를 운영하는 그는 가족 친화적 경영에서 해답을 찾았다.

“제가 직접 직원의 아내와 남편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의 남편, 당신의 아내가 경쟁사가 아니라 우리 회사에서 일해 줘서 고맙다’고 썼죠. 그랬더니 회사 매출이 단박에 연 100만 달러에서 200만 달러로 오르더군요. 아무리 작은 제스처라도 가족에 대한 배려를 보여 줄 때 조직 전체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저도 배웠습니다.”

정미경 교육생활부 차장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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