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홍찬식]건청궁과 중명전, 그리고 고종

  • 입력 2007년 10월 23일 19시 51분


코멘트
건청궁(乾淸宮)과 중명전(重明殿)은 우리 근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현장이다. 경복궁 내에 있었던 건청궁은 고종이 1873년 사비(私費)를 들여 세운 한국식 건물이었다. 고종과 명성황후 부부의 거처로 쓰이다가 1895년 10월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후 폐쇄된 채 방치되어 있다 1909년 완전히 철거되고 말았다.

다시 탄생한 근대사의 현장

중명전은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게 의뢰해 1899년 완공한 서양식 건물이다. 지금은 덕수궁 경계 밖에 나와 있지만 원래는 덕수궁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고종은 1904년부터 1907년 강제 퇴위 당할 때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그 사이에 1905년 나라를 사실상 빼앗긴 을사늑약이 이 건물에서 체결됐고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도 여기서 이뤄졌다. 현재 정동극장 옆 골목으로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중명전은 겨우 형체만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고종은 두 건물을 거치면서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조선왕조도 함께 종말을 고했다. 두고두고 쓰디쓴 교훈으로 삼기 위해 기억해야 할 건물이지만 역사교과서 어디에도 두 건물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건청궁은 철거되어서 그렇다고 쳐도 중명전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조차 별로 없다.

그러던 중 올해 의미 있는 진전이 이뤄졌다. 올여름 중명전에서는 헤이그 특사 파견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렸다. 꺼져 가는 국운을 살리기 위해 마지막 몸부림으로 특사 파견을 논의했던 바로 그 자리에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됐다. 지난해 문화재청은 민간인 소유로 넘어갔던 이 건물을 다시 인수했다. 건물을 보존하고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건청궁도 복원됐다. 지난 주말 일반 공개를 시작한 새 건청궁은 한옥을 잘 짓는 장인들을 불러 모으고 전국에서 질 좋은 목재를 구해 와 만들었다. 뒤편에 백악산(북악산)을 두고 앞쪽에 향원정을 거느린 빼어난 위치에 자리한 건청궁은 가을의 환한 햇살에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두 건물의 재탄생은 옛 주인이었던 고종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불러온다. 그렇지 않아도 고종에 대한 재평가는 학계의 뜨거운 이슈로 떠올라 있다. 고종이 근대화를 모색한 개명 군주라는 주장이다. 우리 민족이 고종을 중심으로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으나 외세에 의해 좌절되어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에선 왕권 지키기에 급급한 나머지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망국을 자초한 인물로 보고 있다.

이 논쟁은 대한민국의 정통성 문제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고종을 개혁 군주로 보는 측은 민족사적 견지를 강조하고, 고종을 부정적으로 보는 학자들은 우리 내부의 책임과 근대화의 관점을 앞세운다. 친일 청산과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도 확연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이란 말은 언제나 측은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사실상 ‘마지막’ 황제와 황후인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국민 정서는 뮤지컬 ‘명성황후’에 대한 열띤 반응에서 나타나듯이 온정적이다. 하지만 역사는 드라마와 달리 냉정한 잣대로 바라봐야 한다.

고종 평가는 냉정하게 이뤄져야

일제 침략과 관련된 중요한 사건들은 앞으로 몇 년 사이 잇달아 100년을 맞는다. 올해는 헤이그 특사 파견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한 지 100년을 맞았다. 외교권에 이어 내정 권한을 일본에 내주고 군대가 해산됐다. 내후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을사늑약 체결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2010년은 완전히 나라를 빼앗긴 국치일 100주년의 해다.

새로 국민 곁에 돌아온 두 비극의 현장이 단순한 볼거리가 아닌 100년 전 그날들을 되새기는 살아 있는 역사교육장이 되었으면 한다. 고종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도 이제부터 시작이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