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서병훈]배지 다는 北, 따라 하는 南

  • 입력 2007년 10월 12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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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많이 흔들리고 있다. 9·11테러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민주당의 대선 주자인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이 구설에 오르내리는데, 그 이유가 성조기 핀을 달지 않아서란다. 미국 정치인 사이에는 성조기 핀을 다는 것이 유행이다. 애국심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오바마 의원은 그런 세태에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 대신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어 애국심을 증명하겠다”고 말한다.

2001년 참극 이후 미국인은 ‘우리 미국’에 정도 이상으로 집착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유사회의 근본을 가볍게 여기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띈다. 40% 가까운 미국인이 테러범을 찾아내기 위해서라면 고문을 가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중국, 러시아와 같은 수준이다. ‘자유주의의 챔피언’이라는 자랑이 무색하다. 말문이 닫히고 사회가 경색되면 나라가 어려워진다. 미국은 왜 ‘이라크 침공’ 같은 범죄행위를 막을 수 없었는지 깨닫지 못한다. 오바마 의원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이번에도 우리는 김일성 배지를 실컷 봤다. 그런 것을 달면 애국심이 생기고 총화단결도 되는가 보다. 그러나 배지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사회는 사람이 살 곳이 못 된다. 남북 정상회담을 따라갔던 남쪽의 한 지식인이 “수령의 잘잘못은 누가 따지느냐”고 질문했다. 그랬더니 어느 유명 대학의 총장이라는 사람이 그 ‘개똥철학’에 화를 벌컥 내며 “당신은 사이비야!”라고 소리 질렀다고 한다. “대통령이 그런 것도 결정 못하느냐?”는 명언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남북회담장 태극기 배지 조바심

‘자유주의의 적’은 남쪽에도 있다. 종교적 의식(儀式)에 가깝다는 ‘아리랑 집단체조’를 오페라 아이다보다 더한 감동을 주는 예술이라고 말하는 어느 얼빠진 정치인이야 그렇다 치자. ‘서정적이고 장엄한 내용’ 따위를 입에 담는 통일부 장관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의식구조를 가진 것일까.

사이비 민족주의, 서푼어치 알량한 인도주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평양 시내 한복판에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어라’는 현수막이 걸리는 현실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수령님 감사합니다’라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북한 동포의 참상을 직시하지 못한다면 지식인도 아니다.

언제부터인지 남북 회담에 나서는 이쪽 대표도 가슴에 태극기 배지를 달고 있다. 쌍방을 확인하고 구분하기 위한 필요 때문이겠지만, 우리 사회에 그런 식으로 김일성 배지에 대항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자유의 힘을 믿어야 한다.

고대 아테네 시민은 ‘각자 하고 싶은 대로’ 일상생활을 영위했다. 스파르타처럼 고통스러운 규율을 강요하지 않았다.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지만 위기가 닥치면 더 용감하게 싸웠다. 어려서부터 법을 지키는 교육을 받아 자유와 질서가 균형을 이뤘기 때문이다. 2500년 전의 일이다.

자유사회는 무질서한 듯 보이지만 그 가운데서 힘이 나온다. 자유의 위력에 대해 담대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미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조금만 방심하면 자유는 달아나고 만다. 높은 도를 터득한 스님도 그 경지를 유지하기 위해 정진을 계속한다. 한말(韓末)의 고승 경허 스님은 유달리 잠이 많았다. 그는 잠을 쫓기 위해 턱 밑에 날카로운 송곳을 대며 수행했다고 한다.

자유사회의 힘에 믿음 가졌으면

자유사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국민의 정신이 깨어 있어야 한다. 어쭙잖은 이데올로기, 시대착오적인 지역감정에 매몰돼 있을 때가 아니다. 정도를 벗어나 서민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행위에 대해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변절과 배신, 반칙을 일삼는 주제에 입만 열면 민주니 평화니 개혁을 읊어대는 세력에 대해 차갑고 무겁게 응징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 선거를 어린애 장난하듯 입신양명의 기회로 치부하고, 정당정치의 기본을 비웃으며 제도권 밖에서 기웃대는 자들에게도 ‘한여름 밤의 헛된 꿈’의 대가를 톡톡히 지불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에게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는지 심각하게 자문해야 할 시점이다. 자유가 공짜가 아니라는 말, 백번 옳다.

서병훈 숭실대 교수·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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