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남북 頂上선언, 거품 빼고 直視하자

  • 입력 2007년 10월 4일 2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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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한두 번에 남북관계의 획기적인 변화를 바라는 것은 과욕이다. 더욱이 임기가 5개월도 남지 않은 대통령에게 너무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런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제 평양에서 서명한 ‘2007 남북 정상선언’의 문제점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임기 마지막까지 한반도 평화 정착의 전기(轉機)를 마련하려는 노 대통령의 의지를 폄훼하려는 것이 아니다. 정상선언의 과실(果實)도, 부담도 결국 우리 국민의 몫이기 때문에 내용의 허실(虛實)을 ‘거품’ 빼고 냉정하게 따져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김 위원장은 역시 ‘유별난 지도자’였다. 일정을 일방적으로 바꿨고, 노 대통령에게 돌연 체류 연장을 주문하는 결례도 보였다. 노 대통령은 북의 체제 선전극인 아리랑을 참관하며 기립 박수를 쳤고, 만찬에선 건배를 제의하며 김 위원장의 장수(長壽)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런 곡절 속에서도 두 정상은 평화와 경협에 관해 상당한 합의를 보았다. 정상회담의 안정화를 위해서는 고무적이다. 노 대통령이 어제 귀환 보고에서 회담 과정과 내용을 상세히 설명한 것도 남북관계의 투명성 제고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핵은 외면하고 NLL은 양보하나

그러나 정상선언 내용은 특히 북핵과 서해북방한계선(NLL) 문제, 공동선언 이행 보장 등에서 다수 국민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우리는 본다. 중대한 인권문제인 납북자 및 국군포로 문제도 아무 진전이 없었다.

북핵 폐기의 최종 결정권자는 바로 김 위원장이다. 우리 대통령이 그런 김 위원장을 만나는 상황이기에, 국민과 미국 등 관계국들이 노 대통령의 역할을 강하게 주문했다. 그럼에도 정상선언은 ‘핵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 9·19공동성명, 2·13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공동 노력하기로 했다’(제4항)는 언급에 그쳤다. ‘북한 핵’이라는 말조차 집어넣지 못하고 ‘한반도 핵문제’라고 표현했다. 노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앞으로 지켜야 할 원칙으로 재확인했다”고 밝혔지만 정작 공동선언에는 적시되지 않았다.

NLL 문제도 석연치 않은 결과를 낳았다고 본다. ‘우발적 충돌을 막기 위해 공동어로수역을 지정하고 이 지역을 평화수역으로 만드는 방안을 국방장관회담에서 협의한다’(제3항)고 돼 있지만 NLL 양보를 전제로 한 협의라는 인상이 짙다. 정상끼리의 합의문에 이 문제가 명시된 것 자체가 북에 확실한 빌미를 줬다고 할 수 있다. 더욱이 5항에 명시된 민간선박의 해주 직항로 통과는 그 자체로 북한 선박이 NLL을 통과해 항해하는 것을 허용하는 조치로 NLL 무력화(無力化)의 단초가 될 수 있다.

NLL은 ‘우발적 충돌 방지’ 차원에서만 봐서는 곤란하다. 그보다는 수도권 안보와 직결된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수용 전 해군참모총장도 NLL을 양보할 경우 북 해군의 전진배치와 기습 가능성을 우려한 바 있다.

‘공동어로수역’도 말처럼 남북 어부들이 사이좋게 어로작업을 하면 좋지만, 경쟁이 치열해져 사소한 다툼이라도 벌어지면 순식간에 군사 충돌로 번질 우려가 높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도 처음엔 북한과 유엔군이 공동으로 관할했으나, 1976년 ‘미루나무 도끼 만행 사건’ 이후 양측이 나눠서 관리하게 됐다.

경협도 일방적이다. 선언문에 명시된 경협사업의 대부분이 우리 측에서 비용을 대야 하는 것들이다. 해주와 주변 해역을 포괄한다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설치, 경제특구 건설, 안변과 남포의 조선협력단지 건설, 개성∼평산 철도 개보수, 평양∼개성 고속도로 재포장 등은 하나같이 우리의 돈과 장비가 대대적으로 투입돼야 할 사업들이다.

이를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과 공동 번영을 위해서’라고 합리화(제5항)했지만 그 돈은 결국 우리 국민의 세금에서 나간다. 이미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동안의 대북 지원액이 수조 원에 달한다. 이번의 초대형 경협 약속도 엄청난 국민부담을 전제로 한다. ‘또 얼마를 더 쏟아 부어야 하나’라고 걱정할 국민의 심정도 헤아려야 한다.

경협이 평화 보장한다는 낙관은 禁物

더 씁쓸한 것은 북의 수용 태도다. 사소한 문제라고 할지 모르지만 경의선(문산∼봉동)의 철도 화물에 국한된 수송 허용은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 철도는 원래 개통이 약속돼 있었으나 북 군부(軍部)의 반대로 연기됐던 것이다. 북측이 새삼 생색을 내는 듯하지만 왜 화물은 되고 사람은 안 되는가. 이유는 자명하다. 사람은 ‘개방 바람’을 몰고 오기 때문에 싫으니 개성공단에 필요한 화물만 실어 보내라는 것 아닌가.

북은 남측 기업들에 ‘통 큰’ 투자와 기반시설 확충, 자원개발을 요구하면서도 그 전제가 돼야 할 통행 통신 통관의 3통(通)에 대해서는 확답을 주지 못했다. “조속히 완비해 나가겠다”고 했지만 이 문제가 제기된 지 벌써 십수 년이다. 역시 진정한 개방, 개혁에 대한 거부로 비친다. 이런 상황에서는 노 대통령이 강조한 ‘경제지원-평화정착의 선순환’ 구조가 뿌리 내리기 어렵다. 북에 대한 경제지원과 협력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양보와 지원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우리가 얻어 낸 것은 별로 없다.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기 위해 3자 또는 4자 정상의 종전(終戰)선언을 추진한다’는 제4항은 현재로는 실현 가능성이 낮다. 미국은 전제조건으로 북핵의 완전 폐기를 요구하고 있다. 같은 정전협정(1953년) 당사국이지만 한반도 문제에 대한 중국의 전략적 이익이 미국의 이익과 같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신뢰와 실천 善순환해야 남북관계 진전

공동선언의 이행을 위해 남북 총리급회담을 다음 달 서울에서 열기로 한 것도 마찬가지다. 협의사항들은 기존 장관급회담에서도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것들이다. 대선 분위기가 고조돼 있을 다음 달에 ‘선거용’으로 활용하라는 북의 배려 같다는 지적도 있다.

또 7년 전 6·15공동선언에 명시한 김 위원장의 서울 답방에 대한 언급은 없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 현안을 협의한다’(별항 제2항)고 얼버무렸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실천과 신뢰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관계가 진정으로 본궤도에 오르려면 신뢰와 실천이 선(善)순환해야 한다. 실천되지 않는 합의는 불신의 골만 깊게 한다. 2000년 첫 정상회담 때도 6·15공동선언을 놓고 당시 DJ 정권은 “이제 전쟁은 끝났다”며 환호했지만 2002년 서해교전이 일어났고, 북은 작년에 핵실험까지 했다.

합의 가운데 남북관계를 건설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측뿐 아니라 북측의 성실한 이행 노력이 중요하다. 김 위원장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우리 정부는 노 대통령의 다짐대로 국민의 이해와 동의를 구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지속가능한 사업’으로 차기 정권에 인계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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