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승련]성공한 삶과의 결별

  • 입력 2007년 10월 4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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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나 부시(26) 씨가 이번 주 작가로 데뷔했다. 그는 유엔아동기금(UNICEF·유니세프) 자원봉사자로 파나마 판자촌에서 경험한 17세 미혼모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에이즈) 환자 이야기를 담은 책 ‘애나 이야기’를 썼다. 수십만 달러의 선(先)인세를 받았고, 초판만 50만 부를 찍었다.

현직 미국 대통령의 딸이 아니었다면 이런 주목을 받았겠느냐는 수군거림도 들린다. 수익금 전액을 유니세프에 기부하겠다는 뜻이 공개됐다. 지금껏 정치명문가의 딸로 유복하게 지내왔을 뿐 뭔가를 보여 준 일도 없던 그다. 하지만 그에게는 안락한 삶과 사회운동가라는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물론 그에게 양자택일만이 강요될 이유는 없다. 안락하게 살면서도 제3세계 빈곤 문제를 고민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삶의 소외를 다룬 작가로의 변신 자체가 과거처럼 ‘미성년 음주 파티’에 휘말리는 삶과는 결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에이미 블랙 씨는 도시빈민가 공립학교에 명문대 졸업생을 교사로 파견하는 시민단체 ‘티치 포 아메리카(TFA·Teach for America)’의 워싱턴 지부장이다. 국무부에서 직업외교관의 길을 걷다가 몇 년 전 진로를 바꿨다.

예일대 졸업 직후 2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던 시절 경험한 빈민가 아이들의 얼굴을 잊을 수 없어서다. 그는 올해 여름 만난 기자에게 “서른 넘은 딸의 결심을 두고 반대하는 가족은 없었다”고 했다.

얼핏 보면 그는 기득권을 버린 것 같다. 하지만 올 5월 ‘비즈니스위크’가 조사한 대학생 인기 직장 순위를 보면 그렇지도 않다. 국무부(4위)와 TFA(10위)는 수천수만 개의 직장 가운데 ‘꿈의 일터’로 선정됐다.

그는 화려해 보이는 미국 외교관 대신 망가진 학교제도 탓에 미래의 기회가 차단된 아이들에게 꿈을 나눠 주는 다소 무채색 톤의 일을 골랐을 뿐이다.

#존 우드 씨는 네팔 스리랑카 베트남 등 제3세계 아이들을 위해 도서관을 짓고 책을 채워 넣는 일을 한다. 그가 2000년 설립한 ‘룸 투 리드(Room to Read)’라는 단체가 그동안 세운 도서관은 3000개를 넘어섰다.

1998년 히말라야 산행에 나섰다가 네팔 학교의 무너져 내린 교사(校舍)를 발견한 뒤 마이크로소프트 중국 본부의 2인자 자리를 박차고 나온 뒤에 한 일이다. 그동안 급여는 1달러도 안 받았다.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친구는 그를 등졌다. 그런데도 TV 인터뷰에 등장한 그는 “40대 노총각에 들어선 내 삶은 뒤죽박죽이 됐지만 더없이 만족한다”고 웃는다.

어릴 적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던 이 정보기술(IT) 전문가는 부시 씨나 블랙 씨보다는 꽤나 각도가 큰 선회를 했다. 그는 제3세계 책 보급 분야에서만큼은 단연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독보적 존재가 되길 꿈꾸고 있다.

이 세 사람은 평균인과 거리가 멀다. 짧은 기간이나마 인생 전반부에 확실히 ‘잘나가던’ 사람들이었다. 부모를 잘 만났거나, 공부를 잘했거나, IT 붐을 타고 경쟁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과거보다는 투박하지만 의미 있는 영역을 개척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선택이 바람직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다수가 그래야 한다고 주문할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성공한 인생을 살아 봤거나, 확실한 성공의 길에 접어든 소수 중 일부의 ‘새로운 시도’는 누구에게나 특별하게 다가온다.

20세에 큰 부동산을 물려받은, 30세에 법조인이 된, 40세에 대기업 임원이 된, 50세에 중진 국회의원이 된, 60세에 기관장이 된 특별한 이들을 떠올려 본다. ‘새로운 삶을 위한 선택은 남다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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