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임규진]보리와 연탄

  • 입력 2007년 6월 14일 03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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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40대 이상은 보리와 연탄에 얽힌 추억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농촌에서 4, 5월 보릿고개에 여물지도 않은 보리 이삭을 구워 먹다 입 주위에 검댕 칠을 한 분이 많았다. 도시에선 연탄가스 중독으로 김치 국물을 마셨던 분도 한둘이 아니다.

보리와 연탄은 가난했던 1950∼70년대에 국민을 배고픔과 추위에서 지켜 준 은인이다. 보리와 연탄 값이 뛰면 서민들은 살기가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다른 대체재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부는 보리와 연탄의 가격을 적정 수준에서 통제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5000달러를 넘는 요즘 보리와 연탄을 주변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소득수준이 높아지면서 빵과 고기, 석유와 가스 등 대체재를 쓸 수 있게 된 덕분이다.

그런데도 보리와 연탄은 여전히 정부의 가격통제를 받고 있다. 보리 값은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 농가를 위해 높게 책정되고 있다. 연탄 값은 영세민을 위해 낮게 유지된다.

두 품목의 가격통제가 초래한 시장 왜곡과 재정 부담은 경제학 교과서에 실릴 만할 정도다. 보리는 먹지도 않는데 해마다 과잉 생산됐다. 보리의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970년 37.3kg에서 지난해 1.2kg으로 급락했다. 수요가 줄면 가격이 떨어져 공급도 줄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정부가 높은 가격을 보장하니 공급은 별로 줄지 않아 올해 말 보리 재고량이 24만 t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창고 보관비로만 막대한 금액이 들어가는 공급과잉이 벌어진 것이다.

연탄은 반대로 과잉수요가 발생했다. 정상적 소비자가격은 770원인데 337원에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유가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연탄 가격을 낮게 유지하자 화훼 농가를 중심으로 연탄 수요가 급증했다. 차액은 정부보조금으로 메우고 있다. 올해 석탄 및 연탄 보조금 예산만 3390억 원이다.

결국 정부는 분배 효과가 떨어지고 재정 부담만 커지자 보리와 연탄의 가격을 현실화하기로 했다. 보리 수매가격을 인하하고 수매량도 줄여 나가기로 한 것이다(본보 5월 18일자 A1면 참조). 남는 보리밭은 유채나 가축사료용 총체보리 재배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한다. 연탄에 대한 정부보조금도 단계적으로 줄여 연탄 가격을 현실화하기로 했다(본보 5월 22일자 A1면 참조). 연탄을 쓰는 영세민에게 연탄을 직접 지원하는 방안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보리와 연탄의 사례는 시장경제에서 인위적인 가격통제는 지속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 준다. 장기적으로 경제적 약자를 도와주는 분배의 명분은 퇴색하고 비효율을 눈 덩이처럼 키우기 때문이다. 이런 비효율은 결국 성장의 발목을 잡고 빈곤층에 실업과 빈곤의 악순환이라는 치명적 피해를 불러온다.

그렇다고 경제적 약자를 외면하자는 게 아니다. 효율과 성장의 목표는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빌 게이츠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회장은 7일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세계의 불평등 해소를 촉구하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시장원리를 활용하여 가난한 사람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방안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리 생산 농가와 연탄 사용 영세민에 대한 정부 지원은 필요하다. 그러나 유채 밭 전환, 연탄 지원이 근본 대책이 될 수는 없다. 자력으로 부농(富農)과 중산층으로 변신할 기회를 줘야 한다. 이런 기회는 지속적 성장과 좋은 일자리 창출을 통해 나온다.

임규진 경제부 차장 mhjh2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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