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하자

  • 입력 2007년 6월 8일 19시 34분


코멘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란 화두와 씨름해온 학자가 꽤 있다. 고려대 최장집 교수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는 6월 민주항쟁 20주년을 앞두고 몇몇 지식인과 함께 펴낸 대담집(‘여럿이 함께’·프레시안북)에서 ‘정당정치의 강화’를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가 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했다. 민중의 삶의 문제가 정당을 통해 표출·대표되고, 정책으로 조직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는 민주화 세대가 무능해서 민주 ‘운동’을 민주 ‘정치’로 바꾸지 못함으로써 현실적인 삶의 문제 해결에 실패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운동’에서 ‘정치’로의 전환 실패

그가 정치과정론의 관점에서 해법을 제시했다면 숭실대 서병훈 교수는 정치문화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듯하다. 그는 ‘참여의 확대’와 ‘가치 다원주의의 발전’을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를 가늠할 두 기준으로 본다. 국민의 정치참여가 지금보다 확대되고, 가치도 더욱 다원화되면 민주화는 진전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매우 조심스럽다. 오늘의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의 과잉’을 걱정해야 하고, 여러 갈래의 세력과 이해집단 간의 쟁투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을 정도라면 참여와 가치 다원화에도 어느 정도의 제한은 필요하다는 것이다.(‘정치개혁의 성공조건’·동아시아연구원)

세종연구소 박기덕 박사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이미 정착(공고화)됐고, 문제가 있다면 정치행위자들의 행태와 일부 잘못된 정치과정 정도인데 이는 고치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마치 한국 민주주의 자체에 큰 결함이 있는 것으로 여겨 ‘개혁’이란 칼을 들이대면 민주성을 오히려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87년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한국 민주주의의 이론과 실제’·박기덕)

이들의 문제 제기는 바람직스럽다. 민주화 20년이라지만 우리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거의 없다. 학계에선 더러 논의가 있었지만 국민적 관심사로 확대되지는 못했다. 그동안 4명의 대통령이 나왔고, 바뀔 때마다 정치체제의 효율성, 정치문화와의 적합성 여부 등을 놓고 논란이 있었음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아마도 민주주의에 관한 어떤 문제 제기도 ‘개헌 논의’와 연결될 수밖에 없었던 정치 현실 탓이 컸을 것이다. 민주주의 논쟁이 ‘개헌 논의’라는 협소한 공간에 갇히다 보니까 논쟁의 실효성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낮아 살아있는 이슈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섣부른 개헌 제의로 정작 중요한 ‘포스트 민주화’ 문제를 의제화(議題化)할 분위기만 깨고 말았다. 차라리 개헌 얘기를 안 꺼냈더라면 민주항쟁 20년에 대선까지 있는 올해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졌을 텐데 아쉽다. 설 건드려 일을 망친 셈이다.

이번 대선도 예외 없이 “정책경쟁이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들이 높지만 정책 이전에 민주주의의 미래에 대한 각 후보 나름의 밑그림이 제시돼야 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절차적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성됐으니까 이제는 내용과 질(質)을 챙기는 실질적 민주주의로 가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미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정치적 사회적 비용 부담이 과도하니 이를 줄이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것인지, 자신의 견해를 밝혀야 한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우리의 전통과 정치문화를 반영하는 새로운 민주주의 모델이라도 내놓아야 한다.

개헌 대신 제2의 민주화를

임기 8개월을 남겨 놓은 대통령이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발 떨어져서 ‘민주화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구조를 마련해 주라는 얘기다.

평소 민주화 세력의 일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온 대통령이라면 어떻게든 더 나은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았어야 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중대한 문제를 ‘대선과 총선 시기 일치용 개헌’이라는 국소적 이슈로 만들어 버린 것은 뼈아픈 실책이다. 국민에게 곧바로 개헌을 들이밀 것이 아니라 ‘제2의 민주화’와 같은 더 크고 본질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다가갔어야 했다.

민주화 20주년이 되는 해에 대통령 자리에 있다는 것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행운이 아니다. 그런 좋은 기회를 선거개입 시비와 언론 때려잡기에나 쓸 작정이라면 그거야말로 정치적 역진(political backdrop)이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