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승련]주류 미국인의 恐(공)-壁(벽)-怒(노)

  • 입력 2007년 4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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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이 고교 1학년이던 1970년대 초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뒤 고교 과정을 3주 만에 끝낸 것은 소설 같은 이야기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에서 6개월 영어연수를 마친 뒤 한 고교에 입학했다. 첫 주 수업을 듣고 교장을 찾아가 “다 아는 내용”이라며 졸업을 요구했다. 영어가 유창했을 리 만무했다.

손정의는 “시험을 치러 통과하면 졸업시켜 준다”는 교장의 말에 따라 시험장에 나타나 엉뚱한 요구를 꺼냈다. 문제가 영어로 출제됐으니 일본어로 번역해 달라는 거였다. 교장은 “영어 테스트가 아니라 고교과정 내용을 이해했는지가 핵심”이라며 받아들였다. 그 결과가 ‘3주 만의 졸업’이다.

평전을 처음 읽었던 당시만 해도 16세 손정의의 배짱이 부러웠다. 그러나 요즘엔 그 교장의 유연한 사고에서 비슷한 감동을 느낀다. 다양성을 존중하고, 도전적 자세를 높이 평가하는 미국식 가치가 잘 드러난 사례라고 봤다.

그렇다면 지금은? 제2의 손정의가 텍사스나 애리조나 주 어디에선가 비슷한 요구를 한다면 비슷한 결정이 내려질까.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하기 힘들어졌다.

우선 유학생 1명을 위해 시험문제를 외국어로 번역하는 일은 ‘공공기관에 무리한 부담이 아니라면 들어주라’는 빌 클린턴 대통령의 행정명령(2000년)의 범위를 벗어나 있다. 졸업시험의 편의를 돕기 위해 외국어 문제를 만들어 놓았을 것 같지도 않다.

넉넉함이 사라진 배경에는 미국에서 일고 있는 영어의 위기, 즉 정체성의 위기가 놓여 있다. 전 세계가 영어 못 배워 안달인 지금, 미국은 ‘영어를 살려 내자’고 걱정하는 기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새뮤얼 헌팅턴과 같은 학자는 “영어를 못하는 이민자가 밀려들면서 유럽계 백인 중심 문화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며 대놓고 걱정한다.

미국은 ‘영어의 나라’지만, 스페인어로 대표되는 외국어에 최소한 ‘형식적으로는’ 관대하다. 일부 공문서에 스페인어가 병기되고, 일부 주에서는 아직 운전면허 필기시험을 한국어로 치를 수 있다.

그러나 까칠한 바닥정서는 여론조사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조그비 인터내셔널이 2004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82%가 “영어를 미국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자”고 응답했다.

정체성 훼손을 걱정하는 이들의 요구는 ‘미국에 왔으면 영어를 빨리 배우라. 그래서 주류사회에 편입하라. 자꾸 포용력 어쩌고 하면서 예외를 만들자고 요구하지 말라’는 말로 요약된다.

대표주자 격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이달 초 “영어는 성공의 언어요, 스페인어는 게토(빈곤층 거주지역)의 언어”라고 말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녹화된 TV 방송을 봤더니 ‘영어를 배워야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는다’는 뜻이었지만, 정치적 손해만 톡톡히 본 채 사과해야 했다.

히스패닉 이민자를 향한 혹평이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교육열이 낮고, 주위 환경이 나쁜 탓도 크겠지만 히스패닉 이민자의 영어 실력은 미국에서 최하위권이다. 이민자 2, 3세는 ‘부모의 언어’를 잊어 갔지만, 히스패닉 이민자는 사정이 달랐다. 어딜 가도 스페인어가 통하는 상황이니 굳이 영어를 배우려고 노력할 이유가 적다.

미국은 지난 수년간 공(恐) 벽(壁) 노(怒)의 사회가 됐다. 이슬람 테러와 외국인의 일자리 침해가 두렵고, 영어 못하는 외국인에게 마음의 장벽을 쌓고(멕시코 국경엔 철책을 진짜 세웠고), 작은 일에도 쉽게 분노한다.

멕시코 노동자 유입이 지속되고, 천주교도인 이들의 출산율이 백인의 2배가 넘어서는 상황은 당분간 지속될 수밖에 없다. ‘공-벽-노’ 감정은 깊어갈 것이란 이야기다. 오늘의 미국은 주류사회가 ‘평균 미국인이 누구인지’를 자문하고 있는 단계에 와 있다.

김승련 워싱턴 특파원 sr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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