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120년 전의 親中-結日-聯美

  • 입력 2007년 3월 16일 19시 4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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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평화의 성찬이다. 이른 봄 덕인가, 평화에 대한 기대가 봄꽃처럼 피어나고 있다. 뉴욕 베이징 서울 평양에서…. 좋은 일이다. 냉전의 겨울이 이대로 사라진다면, 그래서 칼을 녹여 쟁기를 만들 수 있다면 얼싸안고 춤이라도 추겠다. 정말 갈구한다. 봄 같은 평화를.

6자회담의 성과인 2·13 베이징 합의는 북핵과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를 의미한다. 남북한 민족의 차원을 넘어 관련국 모두가 문제 해결의 당사자로서 참여하게 됐기 때문이다. 잘만 하면 북핵도 풀고 동북아 다자안보협력체제 같은 국제 레짐(regime)도 출범시킬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희망에 가깝긴 해도 어쨌든 기회인 것은 맞다.

기회는 위기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우리로서는 특히 그렇다. 한반도 문제가 6자의 테이블에 올려지는 순간 모든 것은 변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게 돼 있다. 중국 일본 러시아도 참가국으로서 제 목소리를 내려고 들 텐데 지난날과 같은 미국의 우월적 지위가 유지되겠는가. 중국의 성장과 일본의 급속한 군사대국화를 봐도 그렇다.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 체결에 이어 수교라도 한다면 상황은 더 달라질 것이다. 한미동맹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피해지고, 주한미군 철수론도 고개를 들 것이다. 북으로선 오랜 소망이 이뤄지는 것이기도 하다. 북이 미국에 평화협정을 맺자고 처음 제의한 게 1974년이다. 30년이 넘도록 초강대국 미국과 싸워 이긴 셈이 되니 놀랍다.

발가벗긴 채 내던져질 韓國

문제의 핵심은 이런 변화가 평화를 자동으로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어쩌면 우리를 더 어렵고 위험한 상황으로 내몰 수 있다. 체제이론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지난 반세기, 한반도가 불완전한 평화나마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미소(美蘇) 양극체제의 덕이 컸다.

양극체제는 어떤 국가든 자신의 진영(陣營·block)에 들어와 충성을 다하면 그 대가로 안전을 보장해 주는 체제다. 남한은 미국을 극(極)으로 하는 자유진영에, 북은 소련을 극으로 하는 공산진영에 속함으로써 반세기 가까이 안전을 보장받았던 것이다.

소련의 붕괴와 탈냉전으로 양극체제는 벌써 무너졌지만 그래도 한반도엔 아직 잔설(殘雪)처럼 남아 ‘평화 보장의 기능’을 하고 있다. 미소 대신 미중(美中)이 ‘양극’의 역할을 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잔설마저 녹으면 이제는 뭐든 제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루아침에 발가벗긴 채 내던져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100여 년 전 우리는 이미 한 차례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주변 강대국들한테 철저히 유린당했고 끝내는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오죽하면 1880년 일본 주재 청국(淸國)공사 황준헌(黃遵憲)이 방일 중이던 김홍집에게 자신이 쓴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쥐어주면서 “친(親)중국, 결(結)일본, 연(聯)미국 하여, 자강(自强)을 도모하라”고 충고했을까.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방아책(防俄策)이기도 했던 조선책략은 유생들의 반대로 제대로 논의조차 안 됐다.

원교근공(遠交近攻)이라고, 미국이라도 동맹으로 확실하게 잡았더라면 사정은 달라졌을 것이다. 1882년 체결된 한미 수호통상조약 1조는 ‘일방이 제3국에 의해 강압적 대우를 받을 때 다른 일방은 중재를 한다’고 명시돼 있었다. 고종은 여기에 매달렸지만 미국은 외면했고, 일본은 손쉽게 조선을 삼켰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소식에 조선 백성이 분노에 떨 때 조선 주재 미국공사 모건은 일본공사관의 축하연에서 축배를 들고 있었다.

다시 읽어야 할 朝鮮策略

강대국 정치의 본모습이 대체로 이렇다. 그런 치욕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해서 6자회담도 하는 것이겠지만 의도와 방향이 옳다고 해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북이 쉽게 핵을 포기할 리도 없고, 회담 당사국들의 이해관계도 저마다 다르지 않은가.

황준헌은 “모두 조선이 위태롭다고 하는데 조선은 절박한 재앙을 도리어 알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집안의 제비나 참새가 (불붙는 것도 모른 채) 즐겁게 노니는 것(연작처당·燕雀處堂)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했다.(송병기 편역, ‘개방과 예속’)

6자회담의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라면 설령 ‘평화’가 눈에 아른거려도 한 번쯤은 ‘연작처당’의 경구를 떠올려 주기 바란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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