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윤장호 하사에게 진 빚

  • 입력 2007년 3월 7일 19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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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디찬 주검이 되어 돌아온 윤장호 하사의 영결식을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던 ‘노블레스 오블리주(고귀한 자의 의무)’를 떠올렸다. 누구나 갔다 오는 군대를 ‘고귀한 자의 의무’라고 하는 게 사전적으로만 따지면 안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군대를 갔다 오지 않아서 그런지 전방에서 근무하는 장병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된 병사들, 그리고 레바논으로 떠날 우리 젊은이들이 모두 고귀하고 신성한 의무를 묵묵히 받아들이는 이 시대의 노블레스들로 느껴진다.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에도 불구하고 미국 인디애나대를 졸업한 윤 하사의 영혼 깊숙한 곳에도 아마 그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명령’ 같은 것이 자라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 윤 하사처럼 어릴 때부터 미국에서 공부하다 돌아온 어느 여학생의 얘기를 전해 들었다. “미국의 명문 대학생들은 미팅을 할 때도 사회와 역사에 대한 도덕적 의무 같은 걸 진지하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국에 와서 보니 전에 만난 여자친구 얘기하는 애들이 많던데….”

쓴웃음이 났지만, 그 말을 들으며 다시 윤 하사의 영혼을 생각했다.

1980년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선배들은 세상에 다시없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에게 인구의 0.3%인가 0.5%인가, 그 안에 드는 ‘소수의 혜택 받은 사람’이라고 겁을 줬다. 이른바 ‘의식화 작업’을 위한 밑밥 던지기 같은 것이었지만, 마음이 여린 친구들은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집에서는 아들의 고시합격에 목을 매고 있는데 육법전서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이제 의대 본과에 올라가면 시도 때도 없이 시험을 칠 수밖에 없는데 혼자만 ‘고민의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것 같다고 괴로워했다. 심지어 아버지가 김지하의 오적(五賊) 중 하나인 도지사여서 힘들어하는 친구도 있었다.

운동권에 몸을 던진 투사가 아니어도 1970,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시대를 고민하다 사회에 나온 많은 7080의 의식 속에는 너나없이 그 엇비슷한 것들이 있었다. 적어도 김일성의 수령영도론을 신봉하는 주사파가 들이닥치기 이전까지는…. 그건 뭐랄까, 민주화 운동 이전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맹아(萌芽) 같은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시대의 채무의식’에 시달린 건 바로 그 때문이지 않았을까?

세월이 흘렀다. 대부분은 이제 ‘채무의식’마저 희미해진 채 일상에 허덕인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1970, 80년대에 빈둥빈둥 놀면서 혜택만 입은 사람들”이라고 조롱해도 할 말이 없는 세대가 됐다. 서강대 손호철 교수는 어느 칼럼에서 “진시황과 히틀러의 분서갱유를 부른 것 같은 한심하고 소름끼치는 사고방식이고 역사의식”이라고 흥분했지만, 이 전 시장의 말에 대놓고 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손에 잡히는 생산’만 인정하는 듯한 이 전 시장의 견해에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변해 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때문에.

민주화의 정치적 과실(果實)만 따먹고 정작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잃어버린 386집권세력 때문이라고 면피할 수도 없다. 물론 그들에게 애당초 ‘고귀한 자의 의무’ 의식 같은 것이 있었는지부터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으로 마음의 빚이 하나 늘었다.

김창혁 논설위원 ch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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