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호 칼럼]남과 북, ‘不姙의 대화’는 이제 그만

  • 입력 2007년 3월 2일 19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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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합의’에도 불구하고 남북 장관급회담이 이런 식으로 계속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장관급회담이 열린다고 하면 열에 아홉 사람은 “이번엔 또 뭘 퍼 주려고 그러지” 하는 것이 현실인데 뭘 더 기대할 수 있겠는가. 2000년 6·15 공동선언 채택 후 이를 실천한다는 명분 아래 20차례의 회담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열렸지만 현안다운 현안이 해결된 적은 없다. 그저 북에 쌀 주고 비료 주는 창구 역할만 해 왔을 뿐이다.

통일부는 “남북 대화를 제도화하고, 교류·협력의 인프라를 구축한 회담”이라고 평가하지만 낯 뜨거운 소리다. 회담을 통해 남북 경제협력추진위원회 구성과 투자보장합의서 체결 등이 이뤄지긴 했지만 이조차도 북에 뭔가를 좀 더 쉽게 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이산가족 상봉도 성과라고 하기는 어렵다. 만나기만 하면 뭘 하는가. 서신 교환과 자유 왕래, 고향 방문 등으로 조금씩 발전해 나가야 할 것 아닌가.

이 정권 사람들은 ‘퍼 주기’라는 말만 해도 수구 냉전세력으로 몰아붙이지만 솔직히 줄 만큼 줬다. 쌀과 비료만 하더라도 그동안 각각 200만 t과 225만 t을 줬다. 돈으로 치면 쌀은 운송비를 포함해 9000억 원, 비료는 8000억 원이 넘는다. 북이 이번에 요구했다는 쌀 50만 t만 해도 북의 연간 생산량 160만∼180만 t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양이다. 비료 요구분 35만 t은 전체 생산량 43.4만 t의 80% 이상이다. 다른 대북 지원은 빼고도 이 정도다.

회담 대표단에 軍포함시켜야

이렇게 퍼 주면서도 우리가 얻은 것은 없다. 핵은 물론이고, 국군포로나 납북자 문제 한번 제대로 논의한 적이 없다. 남북 공동보도문에 애매한 표현으로 한 줄 언급되는 것이 전부다. 그마저도 북은 큰 은혜나 베푸는 듯 군다. 남북 관계의 특수성을 감안해도 이건 아니다. 과거 서독은 1963년부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까지 34억4000만 마르크, 약 13억 달러(약 1조2000억 원)를 동독에 지원했고, 그 대가로 3만3755명의 동독 정치범을 석방시켰다. 우리는 그보다 많은 것을 주고서도 국군포로 한 명 못 데려오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로든 회담에 변화를 줘야 한다. 양측 회담 대표단에 군(軍) 당국자를 포함시키는 것이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북 대표단은 회담에서 사실상 정치·군사문제인 국군포로·납북자 송환이나 경의선·동해선 철도 연결 얘기만 나오면 자신들은 잘 모른다고 발뺌하기 일쑤다. 철도 연결만 해도 군사적 보장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군 소관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북 대표단장인 권호웅 내각책임참사 정도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

이러니까 회담을 해도 실질적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어렵사리 합의를 해도 북이 뒤돌아서선 군을 핑계 삼아 묵살해 버리는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작년 5월 경의선·동해선 열차 시험 운행이 하루 전에 무산된 것도 그래서다. 이번 평양 합의도 같은 위험을 안고 있다. 이를 막으려면 군 당국자가 대표단에 동참해야 한다. 북과의 어떤 합의도 군이 보증하지 않은 합의는 무효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다. 1991년 역사적인 남북 기본합의서를 탄생시킨 고위급회담도 남에선 합동참모본부 제1차장이, 북에선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각각 참석했다.

회담의 수석대표를 바꾸는 문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의 역량이 못 미더워서가 아니다. 2·13 베이징 합의에 따라 남북 관계 개선은 6자회담은 물론이고 앞으로 열릴 한반도 평화체제 4자회담과 함께 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관급회담도 그 틀 안에서 6자, 4자와 유기적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

6자, 4자회담과 함께 가야

그러려면 외교 전반에 밝은 사람이 수석대표를 맡는 게 낫다. 지금처럼 통일부 장관이 전면에 나서선 ‘쌀 비료 주고 이산가족 상봉 받는’ 남북 대화의 오랜 틀을 깨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장관급회담은 밖으로는 비핵화를 추동하고, 안으로는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과정에서 남북 관계와 북-미, 북-일 관계를 조율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자리 잡아야 한다. 쌀이나 퍼 주는 회담이 돼선 곤란하다. “북이 거부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느냐”는 말은 하지 말자. 그것을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 가능한 남북 대화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대북정책과 외교가 지금 혹독한 시험대 위에 올라 있다.

이재호 논설실장 leejae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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