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권순택]논술이라는 괴물

  • 입력 2007년 1월 7일 20시 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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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 활동, 개인 활동, 근로 경험 가운데 한 가지에 대해 150단어 정도로 설명하시오. 중요한 경험이나 성취, 위험 또는 윤리적 딜레마와 그것이 당신에게 미친 영향, 개인적 국가적 국제적 관심사, 당신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 학문적 관심사, 대학의 다양성에 도움이 될 당신의 경험 가운데 한 가지에 대해 250∼500단어 분량의 에세이를 쓰시오.”

우리 수험생에게 이런 에세이를 요구하는 대학이 있다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그 정도로 어떻게 학생의 능력을 판단하며 변별력이 있겠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만하다. 그런데 이것이 하버드, 예일을 비롯한 미국의 298개 주요 대학이 올해 지원자들에게 공통으로 요구한 에세이 주제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이 요구하는 에세이 주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주제는 인터넷을 통해 미리 공개된다. 학생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토대로 집에서 에세이를 써서 제출하면 된다. 미 대학들은 학교 성적과 수학능력시험(SAT) 점수, 그리고 에세이 2, 3편으로 학생을 선발한다. 물론 학생 선발 권한이 100% 대학에 있고 평가 능력이 축적돼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미국 대학의 에세이와 비교하면 한국의 논술고사는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국내 20개 주요 대학의 정시모집 논술고사가 3일부터 실시되면서 수험생과 가족은 불안에 떨고 있다. 논술 채점에서 ‘글씨’도 평가의 일부가 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글씨 학원에도 수강생이 몰린다고 한다. 유치원생까지 논술학원에 보내야 부모들은 마음이 놓인다. 학생뿐 아니라 교사나 채점 교수들도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다. 2008학년도 입시부터 논술이 자연계로 확대되고 통합논술이 본격 실시되면 스트레스는 더욱 확산될 것이다.

학생과 학부모가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논술이 교육 정상화에 크게 도움이 된다면 참을 만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대학교수들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는 그렇지도 않다. 논술이 고교의 정상적인 교육이나 우수 학생 선발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라는 의견이 절반이나 됐다. 논술 채점의 공정성과 일관성이 없다는 교수도 44%나 됐다.

그런데도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논술이 교육 정상화에 도움이 된다면 가야 한다”면서 “학부모들도 불안해할 텐데 다독거려서 잘해 가도록 힘쓰겠다”고 한다. 한가하게 들린다. 논술학원을 비롯한 논술 사교육이 넘쳐 나고 있는 것은 논술이 학교 교육 정상화에 도움이 안 되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다. 이처럼 현행 논술고사에는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50년 동안 글쓰기를 해 온 이어령 씨조차 “나도 서울대 논술을 통과할 자신이 없다”고 했다.

논술은, 학생은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를 몰라 괴롭고, 교사는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를 몰라 괴롭게 만드는 ‘괴물’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논술은 본고사, 고교 등급제, 기여 입학제 금지라는 이른바 교육 3불(不)정책과 전교조의 수능 무력화와 내신 중심 선발 압력에 교육부가 굴복한 결과물이다. 제대로 된 본고사를 치르지 못하는 대학들의 자구책이란 측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아예 논술고사와 3불정책을 모두 포기하고 대학의 자율적 학생 선발권을 전면적으로 인정하면 논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새로운 해법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권순택 논설위원 maypo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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