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호 칼럼]2006년 세밑의 ‘코리안 랩소디(韓國狂詩曲)’

  • 입력 2006년 12월 27일 20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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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온 나라가 ‘대통령 중독증’에 걸린 듯싶다. 자나 깨나 신문 방송마다, 여야 할 것 없이 온통 대통령 타령 일색이다.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언론기관은 대통령 직’이라고 이 칼럼에 적은 것이 불과 한 달 전의 일이다. 노무현 님께서는 “대통령의 말, 대통령의 행동은 억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신문의 1면 머리, 또는 전면을 공짜로 도배질”한다는 나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의 연설을 통해 몸소 입증해 주었다. 이로써 나는 또 한번 노무현 님께 감사를 빚지게 됐다.

내가 노무현 님께 진심으로 더 큰 감사를 빚지고 있는 것은 그보다도 다른 데에 있다. 오늘은 여기에서 그것을 고백해야 되겠다.

내가 평소 우려해 온 ‘절제의 나사가 빠진 한국사회’의 병리현상을 국가 원수의 수준에서 과시한 이번 노 대통령님의 무절제한 막말의 연설은 그렇다고 해서 어느 평자의 말처럼 단순히 한 ‘정치적 로맨티시스트’의 몸부림 말부림에 그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한다. ‘정치란 가능한 것의 예술’이라고 한 비스마르크의 말에 빗대어 빌리 브란트는 그렇기에 정치가는 불가능한 것도 추구하는 예술가를 부러워한다고 어느 연극인 모임에서 토로한 일이 있다.

말로 빚은 1시간10분 행위예술

노무현 님은 어른으로선, 공인으로선, 하물며 대통령으로선 할 수 없는 말, 도저히 불가능한 말을 이번에 장장 1시간 10분에 걸쳐 기탄없이 쏟아 냈다. 정치가의 차원을 넘어선 차라리 예술가의 작태, 하나의 ‘행위 예술’, 하나의 ‘코리안 랩소디(한국 광시곡·韓國 狂詩曲)’쯤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할 듯싶은 ‘공연’이다.

이것을 단순히 노무현 대통령의 문제로 봐야 할까. 오직 노무현 대통령의 위기 현상으로 봐야 할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2006년 세밑의 ‘코리안 랩소디’로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노무현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 한 대통령의 위기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한국의 대통령제도 그 자체다. 대통령책임제, 혹은 대통령 ‘무책임제’라는 반세기에 걸친 한국의 정부 형태가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머지않아 갑년(甲年)을 맞는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 이래 단 한 사람의 ‘성공한 대통령’도 배출하지 못한 정부 형태가 더는 이대로 갈 수 없다는 것, 가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을 노무현 님은 취임 초부터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도 확실하게 일반 국민에게―반대자들뿐만 아니라 지지자들에게도―온몸으로 입증해 주었다. 바로 이 점에서 나는 노무현 님에게 큰 감사를 빚지고 있다.

얼마나 어렵사리 쟁취한 대통령 직인데, 그럼에도 그 자리에 오르자 이내 “대통령 노릇 못해먹겠다”고 솔직하게 대통령책임제의 어려움을 온 국민에게 알려 준 대통령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권력을 통째로 내주고 대연정을 하고 싶다고 토로함으로써 현행의 제도로는 그것도 불가능한 대통령책임제의 문제점을 친절하게 가르쳐 준 대통령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한번 뽑으면 뉘우친들 무슨 소용, 5분 동안에 투표하고 5년 동안을 후회해도 아무 방편이 없는 이 대통령(무)책임제의 위험성을 취임 이후 4년 동안 기회 있을 때마다 상식을 초월한 ‘부조리극(劇)’ 같은 언사로 온 국민에게 교시해 준 대통령이 또 어디 있다는 말인가.

대통령制모순 이대로 둘건가

2006년 세밑의 ‘코리안 랩소디’를 감상하며 내게는 섬뜩한 생각이 든다. 친(親)평양 인사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통 큰’ 북의 위원장 동무가 새해에는 말썽도 많고 값도 비싼 핵 개발 대신에 앞으론 대남 적화공작을 전폭적인 평화전략으로 수정한다. 그래서 내년 대선에는 위원장 동무의 충실한 심복으로 하여금 남한의 젊은이를 현혹시키는 멋쟁이 ‘진보’ 인사로 위장해 입후보시켜 모든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 당선만 시킨다. 그 뒤엔 무슨 짓을 하건 임기 5년이 보장된 ‘남반부’의 대통령 직에….

끔찍한 백일몽이오, 소름 끼치는 악몽이다. 대통령책임제란 바로 그처럼 치명적으로 위험한 제도일 수 있음을 널리 사무치게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나는 노무현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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