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진]당신의 조국은 어디인가

  • 입력 2006년 12월 14일 20시 0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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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교실에서 분실사고가 일어난다. 체육시간에 두고 나간 지갑 속 돈이 사라진 것이다. 돈을 잃어버린 학생은 금방 울상이 되고 친한 급우들은 자신의 일인 듯 속상해 한다. 담임선생님은 수업을 중단한 채 학생들의 눈을 감게 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요구한다. “돈 가져가는 것을 본 사람은 손들어라.”

분실사고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돈을 가져간 사람은 물론이고 그 장면을 목격한 학생도 선뜻 나서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다. 우연히 현장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고자질한다는 부담이 더 크다. 몰래 일러바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어디 한두 번 들었던가.

그러나 밀고(密告)가 정당화되는 영역이 있다. 용인되고 권장될 뿐만 아니라 상까지 받는다. 바로 스파이들의 활동 무대인 첩보의 세계다. 첩보 싸움은 두 당사자의 경쟁과 대립의 정도가 강할수록 더욱 치열해진다. 냉전시대에도 미국과 옛 소련은 첩보전만큼은 열전을 치렀다.

그도 그럴 것이 정확한 기밀 한 가지가 단번에 열세를 우세로 바꾸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1962년 쿠바 핵미사일 위기가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핵전쟁으로 번질까 봐 세계인들이 공포에 떨던 때였다.

당시 미국은 소련의 미사일 성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련 SS4 미사일의 위력과 규모가 자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을 앞선다고 여겼다. ‘SS4가 날아가는 파리도 맞혀 떨어뜨릴 수 있다’고 소련이 떠벌린 효과도 있었다. 또 미국은 쿠바에 설치되는 무기가 지대공미사일이라는 소련의 위장 선전을 뚫지 못했다.

이때 올레크 펜콥스키 소련 군사정보총국(GRU) 대령이 미국을 도왔다. 그는 SS4가 우수하기는커녕 미사일 기수도 적고 사거리도 짧다고 폭로했다. 쿠바에는 핵미사일이 설치되며 실전 배치까지 오래 걸린다고 귀띔했다.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쿠바를 해상 봉쇄하면서 뚝심으로 맞선 데는 펜콥스키 대령의 첩보가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스파이는 극단적인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한쪽에서는 영웅이 되지만 반대편에서는 변절자로 낙인찍힌다. 2005년 한국을 다녀간 로버트 김 씨는 상반된 대접을 받은 최근의 사례다. 그는 미국에서 국가기밀취득음모죄로 9년간 갇혀 지냈지만 한국에서는 뒤늦은 위로와 환대를 받았다. 펜콥스키 대령은 소련에 의해 가장 극악한 방식으로 처형됐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스파이로 나서게 되는 동기는 가지가지다. 출세가 좌절되거나 체제가 역겨워지면 다른 생각을 품게 된다. 많은 돈이 필요하거나 연인에게 버림받는 것도 계기로 작용한다. 이념과 대의를 철두철미 신봉하는 스파이들도 있다. 펜콥스키 대령은 부친이 반공산주의자였던 점이 드러나 승진이 막히고 뒤이어 환멸이 찾아왔다고 한다.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애국심이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스파이 임무를 떠맡은 사례도 적지 않다. 독립전쟁 때 미국 스파이였다가 영국에 붙잡힌 네이선 헤일은 처형장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뿐이라는 게 유감이다.”

요즘 간첩 뉴스를 종종 접하면서 조국과 애국의 의미를 한번 곱씹게 된다. 다음의 물음에 우리 모두는 일치된 답을 자신 있게 내놓을 수 있을까.

“당신이 사랑하는 조국은 어디인가?”

이 진 국제부 차장 lee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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