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허승호]546만 위의 158만

  • 입력 2006년 12월 3일 19시 4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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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한 자동차 공장의 레저용차량(RV) 조립라인에서 오른쪽 바퀴는 정규직이, 왼쪽 바퀴는 비정규직이 끼운다. “서로 다른 일을 한다”고 말하기 위한 편법이다. 비정규직의 임금은 정규직의 60% 남짓이다. 언제 잘릴지도 모른다. 이 공장에서 정규직은 거의 근속 15년 이상이다. 회사는 인력이 필요할 때마다 저임에 해고도 쉬운 비정규직으로 충원하며 정규직 채용을 기피했기 때문이다.

은행의 비정규직 임금은 같은 일을 하는 정규직의 30% 수준밖에 안 된다. 전자 조선 철강 은행 등 대부분의 산업에서 이런 식으로 인력을 운용하다 보니 비정규직은 이제 전체 근로자의 35.5%, 546만 명에 이르렀다. 약자일지언정 결코 소수는 아니다.

서울시 지방공무원 공채 경쟁률 162 대 1이 보여 주는 ‘살인적인 청년실업’의 뿌리도 비정규직 문제와 닿아 있다. 평균 실업률 3.3%는 높은 편이 아니지만 청년 실업률은 8%나 된다. 기업은 비정규직을 뽑으려 하지만 대학 문을 나서는 신규 구직자들은 정규직 일자리를 찾기 때문에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이제 비정규직은 노사 갈등의 주요인이다. 비정규직의 노조 조직률은 2.8%로 전체 근로자 평균(10.3%)에 비해 아주 낮지만 작년 이후 중요 쟁의는 대개 비정규직에서 발생했다. 올해만 해도 KTX 승무원노조, 울산지역 건설플랜트노조, 포항지역 건설노조, 완성차 3사 등의 비정규직들이 극렬한 쟁의를 벌였고 화물연대는 1일부터 파업 중이다. 앞으로 노조 조직률이 높아지면 이들의 불만이 어떻게 표출될지 걱정스럽다.

모든 근로자를 정규직화할 수는 없다. 창의적이거나 일시적 업무 등 직무 특성에 따라 비정규직이 적절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임금 등에서 차별 대우를 하려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면 ‘주변부 계층’이라는 2등 시민을 만들게 된다.

사실 비정규직 급증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와 사용자의 합작품이다.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철폐”를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의 ‘철밥통 고용과 임금’에 따르는 기업 부담을 비정규직에게 슬쩍 떠넘겨 버렸다. 158만 조직 근로자가 사실상 546만 비정규직을 착취하는 구조다. 대기업 노조가 주축인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은 이번에 통과된 비정규직 3법과 관련해서도 “질병 출산 등의 경우에만 비정규직을 허용하라”며 법안 처리를 2년이나 지연시켰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비정규직의 상당수가 해고된다. 말과 행동이 다른 전형적인 예다.

앞으로도 과제는 산적해 있다. 정규직, 비정규직 모두 직무평가를 실시해 임금을 직무에 맞춰 주면 차별을 줄일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임금체계를 연공급(年功給)에서 직무급으로 바꿔야 한다. 해고가 유연해지지 않으면 기업은 비정규직을 선호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해고권을 갖되 여건이 좋아지면 해고 근로자를 우선 채용하는 ‘일시귀휴제’를 도입하고, 신규 고용을 할 때 일정 부분을 재고용 시장에서 충당하는 데 대한 노사 대타협도 좋은 대안이다. 재고용 시장이 먼저 활성화되지 않으면 해고가 유연해지기 어렵다. 이를 위해서는 재교육 및 해당 기간 생계보장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문제 해결의 궁극적 열쇠는 대기업 노조가 쥐고 있다. “비정규직을 없애라”고 목소리만 높이면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내놓지 않는다면 이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런 접근으로는 ‘노동자 동지’의 고통을 덜어 줄 길이 막막하다.

허승호 논설위원 tiger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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