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옥자]동구릉에 서서

  • 입력 2006년 10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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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고등학교에 다니던 1950년대 말 서울은 전란의 폐허 속에 여전히 옛 정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동대문시장을 배오개시장으로, 회기동을 떡장거리로 불렀다. 교통 사정은 말이 아니어서 10리 길 정도는 걸어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떡장거리에서 버스를 내려 이문동을 거쳐 천장산을 동서로 관통하는 고갯길은 참 좋았다. 다복솔이 소복소복 자라서 어둡지 않고 인적이 드물어 여러 가지 생각에 잠긴 채 긴 고개를 넘을라치면 천장산 동쪽 자락에 조선 20대 왕 경종의 의릉이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능 앞엔 재실이 있었고 그 앞에 낙락장송 대여섯 그루가 능지기처럼 서 있었다. 추운 겨울날엔 양지바른 왕릉의 잔디에 앉아서 해바라기를 하며 쉬었고 여름날엔 정자각 그늘에 앉아 땀을 들였다. 지금 생각하니 의릉이 거기 있어서 나는 늘 그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즐겨 걸었던 것 같다.

훗날 문화재위원이 되어 의릉을 다시 찾았다. 고갯길은 간데없이 집이 꽉 들어차고 산천이 변한 것이야 어쩌랴만, 능 앞에 연못을 파고 향나무를 심어 일본식 정원과 같은 모양새에 바비큐의 흔적까지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권력 기관이 자리 잡았다가 나간 직후였다.

왕릉은 살아 숨쉬는 문화재

우리는 조선왕조와 그 문화에 대해 평가절하 하는 경향이 있다. 식민사관에 의해 지속적으로 세뇌 받은 결과였다. 그러한 왕조의 왕이 잠들고 있는 능을 존중할 필요가 없고 좀 훼손한들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이었을지 모른다. 권력은 유한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변한다는 데 생각이 못 미쳤는지도 모른다. 조선왕조에 대해 이야기하면 왕조를 재건하려는 복벽주의(復(벽,피)主義)로 오해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다.

조선왕조는 우리가 사는 시대와 가장 가까운 전통시대이다. 일제에 의해 단절되어 상당 부분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됐지만 싫든 좋든 우리의 한 부분을 이룬다. 이 시대에 대한 올바른 연구와 해석, 평가 작업은 전통의 재구성과 거기 따른 우리의 정체성과 직결된다. 왕조의 유산인 왕릉과 같은 문화재도 그런 측면에서 의미가 있지 왕조에 대한 향수나 복벽주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궁궐이 왕의 양택이라면 왕릉은 왕의 음택이다. 양택이든 음택이든 왕이 살다간 흔적이므로 시대 연구에 중요한 자료임에 틀림없다. 양택인 궁궐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관심과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음택인 왕릉은 별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사실 왕릉만큼 시대를 총체적으로 보여 주는 문화재도 드물다. 왕릉의 주인인 왕의 일대기는 정치사요, 그 조성 경위는 당시 토목공사의 수준과 조경 및 건축 기술을 보여 준다. 또 왕릉의 자연환경과 입지조건은 전통 지리학의 실체와 ‘풍수’라고 하여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추구하던 친환경적 자연관을 확인할 수 있는 자취다. 나아가 거기 설비된 곡장 병풍석 난간석 문인석 무인석 망주석 장명등 혼유석 등 석물은 우리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서울은 조선왕조의 수도였으므로 왕릉이 서울 부근에 있는 것도 우리에게 다행이다. 서울의 동쪽에 있는 동구릉을 비롯하여 서쪽의 서오릉, 서삼릉이 대표적이다. 동구릉은 태조의 건원릉을 비롯해 문종의 현릉, 선조의 목릉, 인조계비 장렬왕후의 휘릉, 현종의 숭릉, 경종원비 단의왕후의 혜릉, 영조의 원릉, 헌종의 경릉, 문조(익종)의 수릉 등 아홉 개의 왕릉이 몰려 있는 군집 능으로 행정구역상 경기 구리시에 있다. 구리시에 의해 동구릉에 대한 기초 연구가 시작된 것은 격려할 만한 일이다.

향토사 눈 뜬 지자체에 박수를

지방자치단체가 자신의 지역 안에 있는 문화재에 눈을 뜨고 일회용 행사거리로만 알던 자세에서 벗어나 진지한 학술토론의 장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향토사 연구야말로 책상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료 중심의 역사 연구를 현장 중심의 실물역사학으로 확장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조선시대 문화사의 공백을 메우는 획기적인 작업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11월 16일 구리시가 주최하는 ‘동구릉의 역사와 문화’ 학술대회에 관심을 가져 봄 직하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국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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