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육정수]지하벙커

  • 입력 2006년 10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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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케냐의 한 종교 지도자는 한 달 전 수십 명의 신봉자와 함께 자신들이 만든 지하벙커로 들어갔다. 핵전쟁에 대비해 1년간 밖으로 나오지 않을 계획이라 한다. 식량은 물론이고 방독면과 장갑까지 갖췄다고 외신은 전했다. 이들은 ‘심판의 날’로 찍은 9월 12일이 이미 지났는데도 계속 라디오를 붙들고 앉아 핵전쟁 뉴스를 기다리고 있다. ‘야훼의 집’이라는 종교의 지도자가 북한과 미국 간에 핵전쟁이 일어난다고 예언하는 바람에 벌어진 소동이라나.

▷이역만리 아프리카 사람들마저 현대판 ‘노아의 방주’인 지하벙커로 몸을 숨기는 마당이니 우리 국민의 불안감은 말할 것도 없다. 생필품 사재기 같은 민감한 반응은 없었지만 북의 핵실험이 낳은 충격은 쉽게 치유되기 어려울 것 같다. 성숙한 시민정신 덕분인지, 햇볕정책에 길든 안보 불감증 때문인지 겉으로만 평온할 뿐이다. 지하벙커까지 갖춘 서울 강남지역 최고급 빌라가 주목받고 있다는 소식이고 보면 민초들의 마음을 알 만하지 않나.

▷재래식 전쟁의 경우에도 지하벙커는 유용한 전투지휘 또는 피신(避身)시설이다. 1961년 박정희 소장이 5·16 거사를 지휘했던 곳도 6관구 사령부(현재 서울 영등포구 문래근린공원) 지하벙커였고, 1979년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 대통령 등을 살해한 뒤 미리 대기시켰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함께 직행한 곳도 육군본부(현재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지하벙커였다. 12·12쿠데타 당시 노재현 국방장관이 몸을 피한 곳 역시 한미연합사 지하벙커였다.

▷정부 주요 기관과 군 지휘부는 핵 공격도 피할 수 있는 1등급 지하벙커를 갖고 있다고 한다. 1등급은 전국에 23곳뿐이어서 총 2만7000여 명, 즉 인구 1만 명 중에 6명만이 대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일반 국민이 피할 곳은 2, 3등급인 지하차도나 건물 지하, 지하철 역사밖에 없다.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대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죄 없는 국민만 방사능을 쬘 판이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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