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한기흥]朝中 연합사령부를 아시나요

  • 입력 2006년 10월 1일 19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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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자동차로 1시간 거리.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는 데는 13일이 걸렸다. 기습적인 상륙작전을 어느 정도 눈치 챈 북한군이 완강히 저항했기 때문이다. 북에 그런 가능성을 미리 귀띔해 준 게 중국이었음은 나중에 밝혀졌다.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는 이미 그해 8월 중순부터 미군이 상륙작전을 펼 가능성이 가장 큰 항구로 인천을 지목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중국을 찾은 북한 노동당 관계자를 통해 김일성에게 이에 대비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중국은 그해 10월 압록강을 넘기 훨씬 전부터 6·25전쟁의 전황을 면밀히 체크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참전은 청일전쟁(1894∼95년)으로 상실했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반세기 만에 되살렸다. 이와 관련해 특히 주목할 일은 중국과 북한이 양측 군을 단일 지휘체계로 묶는 ‘조중(朝中)연합사령부’를 극비리에 구성한 사실이다. 이는 당시엔 대외비(對外秘)였지만 근래 들어 박명림 연세대 교수, 와다 하루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 등의 연구를 통해 그 실체가 드러났다. 이종석 통일부 장관도 학자 시절인 2001년 관련 논문을 썼다.

이들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은 1950년 12월 3일 김일성을 은밀히 불러 양국 군의 통일적 지휘체계를 만들 것을 제안했다. 두 나라의 작전지휘가 나뉘는 바람에 심지어 서로 맞붙은 사례도 있다는 지적에 김일성은 수긍했다. 작전지휘권을 중국에 넘기는 건 북의 자주권 포기를 의미했지만, 소련도 조중연합사 구성에 찬성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에 따라 사령관은 펑더화이(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부사령관은 김웅(북한 인민군 총참모장)이 맡는 연합사령부가 구성됐다. 실제론 중국이 일방적으로 지휘한 조중연합사의 전술과 역량은 간단치 않았다. 세계 최강의 미군은 중국에 밀려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고전 끝에 결국 1953년 7월 정전협정을 체결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한국의 전시작전통제권 단독행사 및 한미연합사령부 해체 추진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효율적 지휘 체계와 승패이지 ‘껍데기 자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장차 북에 급변사태가 생길 경우 중국이 취할 행동도 염두에 둬야 함은 물론이다.

북-중이 1961년 7월 체결한 ‘조중 우호 협력 및 호상원조 조약’을 보자. 이 조약 2조는 “체약 일방이 어떠한 한 개의 국가 또는 몇 개 국가의 연합으로부터 무력 침공을 당함으로써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경우에 체약 상대방은 모든 힘을 다하여 지체 없이 군사적 및 기타 원조를 제공한다”고 돼 있다. 유사시 중국의 자동개입 근거를 명문화한 것이다.

학계에선 중국이 자동개입을 않겠다는 뜻을 북에 비공개적으로 통보했다는 관측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공식적인 조약문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이 조항이 아직 유효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렇다면 북-중이 공고한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상황에서 한미동맹의 약화를 초래할 결정을 내리는 게 과연 현명한 일인가. 노무현 대통령은 자주로 포장된 전시작전권 환수의 정치적 이익을 챙기고 떠나면 그만일지 모르지만 국민과 다음 정권은 두고두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무엇보다 북한과 중국 좋은 일만 시켜 줄 이유가 없다.

한기흥 논설위원 eligi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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