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고미석]어진 인재들이 그립다

  • 입력 2006년 8월 24일 20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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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그리던 내일이다.”

예전에 김승희 시인에게서 이 말을 처음 듣던 날, 내가 무심코 보내는 하루하루의 일상이 얼마나 사무치게 소중한 것인지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 수첩 한쪽에 적어 놓았던 이 말을, 지금 책상 위에 쌓인 신간 서적 더미에서 다시 마주쳤다.

책장을 들춰 보니, 치열하게 살다 간 사람들이 삶의 끄트머리에서 남긴 한마디가 담겨 있다. 평소 같으면 평범하게 느껴질 말들도 ‘죽음의 문턱’이라는 시간적 배경에서 들여다보니 훨씬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중 유독 시선을 끄는 말이 있다.

“사람을 채용하는 일에 결코 편중됨이 없도록 하라.”

조선의 대학자이자 경륜가인 율곡 이이가 임종 전날, 찾아온 후학 정철에게 남긴 말이라고 한다. 나라 걱정으로 가득 찬 율곡의 이 말은 너무도 실제적이어서 책 속의 아름다운 경구들 사이에서 생뚱맞아 보일 정도다. 율곡이 선조에게 올린 ‘시무 6조’를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운 기억도 난다. 극심한 당파싸움 와중에 선조는 파벌이 추천하는 ‘코드형’ 인물을 등용했다. 율곡은 그 편중된 인사를 걱정해 ‘어질고 유능한 사람에게 일을 맡길 것’을 임금을 위한 으뜸가는 조언으로 삼았다.

세월이 흘러도 율곡의 조언은 더욱 빛을 발한다. 능력에 대한 판단은 차치하고라도 ‘어진 성품’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 요즘 조선의 후예들은 일상 속에서 그 평범한 진실을 고통스럽게 체득하는 중이다. 나라의 일을 부여받아 그걸로 먹고사는 이들의 입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사나운 말들, 사생결단식의 칼바람이 부는 듯한 고집불통의 거친 태도. 여기에서 뿜어 나오는 부정적 에너지가 온 국민의 심성과 정서를 황폐화하는 것을 보면서 16세기 율곡 선생이 그 말을 남겼던 깊은 뜻에 감복하게 된다.

나라의 발전에서도 그렇겠지만, 기업 등 조직집단의 성공이나 개인의 성취에도 ‘능력+어진 마음’의 성공 공식이 그대로 통용되는 것 같다.

일본이 낳은 세계적 최고경영자(CEO) 이나모리 가즈오는 전자부품회사인 교세라를 창업해 글로벌 대기업으로 키워 냈다. 그의 경영철학은 ‘선한 생각이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인생의 목적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는 좋은 사람이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 배려하는 마음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세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힘쓰는 정신으로 현재 매출액만 5조 엔대를 넘는 초일류 기업을 일궈 냈다.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하는 여학생들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 학교를 세우겠다는 미국 ‘토크 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 그녀에게 가장 특별한 점은 무엇일까. “자신의 성공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끌어당겨 성공하게 해 주는 사람”이란 주변의 평가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이들은 ‘네편 내편’ 없이 더불어 성공할 길을 찾고자 하는 어진 인재들이 아닐까 싶다. 능력 있고 어진 인재는 조선시대에만 필요했던 게 아니다. 그저 강퍅하고 모질게 나서야 더 대접받는 듯한 지금 이곳. 다시 어진 사람들이 그립다.

고미석 문화부장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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