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최영해]“인공위성이 더 좋아요”

  • 입력 2006년 8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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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샌 ‘인공위성’이 좋아. 아무 걱정이 없어.”

최근 만난 한 고위 공무원은 “요즘처럼 마음이 편할 때가 없다”고 털어놨다.

그는 1년여 전 다른 부처에 파견 나갔다가 몇 달 전 복귀했지만 자리가 없어 대기 상태에 있다. 관가(官街)에선 이런 고위 공무원을 ‘인공위성’이라고 부른다. 서둘러 자리 잡아야 할 그가 이처럼 여유를 부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지금 좋은 보직을 받아 봐야 앞으로 얼마나 더 하겠어. 나중에 정권이라도 바뀌어 봐. 그동안 호강한 공무원들을 그냥 놔둘 것 같아?”

‘인공위성’들은 마음이 편치 않아야 하는 게 정상이다. 좋은 자리를 얻으려고 이줄 저줄 기웃거리는 게 관료들 속내 아니던가. 하지만 요즘 관가에선 자리에 초연한 ‘인공위성’이 한둘이 아니라니 뜻밖이다.

1년 전쯤 일이다.

이른바 ‘잘나가는’ 한 고위 공무원이 해외근무 발령을 받았다. 앞만 보며 달려온 그였기에 밖에 나가는 것 자체가 큰 충격인 듯했다. 출국을 앞두고 마련된 환송회에서 그는 애써 웃음을 지었지만 마음 한 구석의 울분은 감추지 못했다. 떠나는 선배를 안쓰러워한 후배 공무원들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나중에 화려하게 복귀하실 것”이라며 빈말로나마 위로했다. 해외근무는 ‘물 먹는’ 자리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지금은 사정이 180도 바뀌었다.

국제기구 파견 같은 해외근무를 자처하는 엘리트 공무원이 한둘이 아니다. 타 부처 파견경력이 있는 ‘인공위성’까지도 다시 해외에 나가려고 손들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본부 자리가 워낙 적은 탓도 있겠지만 예전처럼 아등바등 본부 직책국장 자리에만 매달리지 않는다고 한다. 해외근무를 자청한 한 엘리트 공무원은 “공직생활을 천천히 하고 싶다”고 말했다. 후배가 선배를 건너뛸 수 있는 무한경쟁 체제인 고위공무원단 제도가 공직사회에 도입됐는데도 그는 ‘느린 걸음’을 택했다.

요즘 과천 관가에선 “국장보다 심의관 자리가 더 인기다”는 얘기도 공공연히 나돈다. 책임을 져야 하는 국장보다 비록 권한은 작지만 전면에 나서지 않아도 되는 심의관이 훨씬 낫다는 것이다. 윗선과 ‘코드’가 맞지 않더라도 버틸 수 있는 자리기 때문이라고 하니 그냥 웃어넘기기엔 씁쓸하다.

승진해야 할 사람은 정작 명단에서 빠지고 ‘코드 인사’가 활개 쳐서야 어찌 공직사회가 활기차게 돌아갈 수 있으랴. 승진이 유력하던 한 경제부처 간부가 인사에서 물 먹은 뒤 “당장 장관 방에 찾아가 따지고 싶었지만 오히려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도 있다는 선배 말을 듣고 꾹 참았다”고 말했다. 과거정부에서 청와대 근무 경력이 있는 한 관료는 “청와대에 있었다는 이유로 지금처럼 ‘벼락출세’한 적은 없었다”며 고개를 내젓는다.

관료들 사이에 왜 이런 자조 섞인 울분이 쌓여 가는 걸까. 대통령이 틈만 나면 공직사회의 ‘혁신’을 되뇌어도 관료들의 사기를 꺾어 버리는 망가진 인사 시스템으로는 공직사회를 설득하기 어렵다. 유진룡 전 문화관광부 차관 인사파동에서 보듯이 후배들에게서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는 관료를 오히려 옷 벗기는 세상이다. 이 마당에 청와대가 공직기강을 다잡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을 보니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사정이 이런데 ‘세월이 약’이라며 숨죽이는 공무원들의 복지부동(伏地不動)을 어찌 탓하겠는가. 꼬박꼬박 세금 내는 국민들이 안쓰러울 뿐이다.

최영해 경제부 차장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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