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귀향

  • 입력 2006년 8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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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아침 전남 진도의 분위기는 자못 뒤숭숭했다.

일본에서 찾아온 손님들을 맞기는 해야 했지만 대한해협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주민들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이날 아침 일찍 보란 듯이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강행했다.

광복절에 진도를 찾은 일본 손님 20여 명은 1597년 정유재란의 격전지였던 진도 앞바다에서 떼로 목숨을 잃은 일본 수군의 후손들이었다.

일본군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는 전투 중 조선군에 잡혀 목숨을 잃었다. 조선군이 구루시마의 시체를 토막 내 내걸자 전의를 잃고 달아나던 일본군은 물살 빠른 진도 앞 바다에서 조선군이 놓은 덫에 걸려 몰살했다. 구루시마 장군의 고향에서 함께 온 병사들만 헤아려도 700명이고 이 중 600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전해지는 비참한 패배였다.

일본에서 온 손님들은 먼저 진도군 고군면 내동리 주민들을 찾아 큰절을 했다. “조상의 시신을 거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시의 진도 사람들은 물살에 떠밀려 온 일본군들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 주었다. ‘왜인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으로 무덤을 쓴 언덕에 왜덕산이란 이름도 붙였다.

30도를 넘는 더위. 풀과 칡으로 덮여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운 떼무덤 앞에서 구루시마 장군 가문 현창회 사무국장 등의 일행은 일본식 제를 올렸다. 그리고 그날 밤 진도 사람들은 약식으로나마 죽은 혼백들의 넋을 달래는 진도 고유의 씻김굿판을 벌여 주었다.

“마을사람들도 솔직히 고민은 했지만…전쟁은 나라 간의 일이고 인간은 국경을 초월하는 것 아니겠느냐고들 뜻이 모아지더군요.”

왜덕산의 존재를 일본인 후손들에게 처음 알린 이 지역 사학자 박주언 씨의 전언이다.

정유재란의 전투에서는 일본군 병사만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왜덕산에서 불과 4, 5km 거리에는 당시 목숨을 잃은 진도 사람들의 무덤도 모여 있다.

진도에 묻혔던 일본군의 혼이 400여 년 만에 후손들의 제례를 빌려 고향나들이를 한 그날, 일제강점기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던 할머니들이 모여 사는 경기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는 특별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할머니들의 고향 모습이 담긴 사진들이었다.

내 나라 땅에 돌아와서도 할머니들은 쉽사리 고향 땅을 밟지 못하며 살아 왔다. 공부시켜 준다는 거짓말에, 혹은 돈을 벌게 해 준다는 말에 내 집 마당에서 강제로 끌려갔지만 그 고통의 체험은 오롯이 할머니들의 몫으로 남았다. “고향 사람들 보기 부끄러워서…”라며 할머니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눈앞에 또렷해져만 가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두고 한국 중국 등의 비난이 빗발치자 고이즈미 총리는 “총리인 인간,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참배했다” “왜 (개인의) ‘마음의 문제’를 두고 주변 국가들이 왈가왈부하는지 모르겠다”며 딴청을 부렸다.

고이즈미 총리에게는 자국의 폭력이 희생자들에게 낳은 바로 그 ‘마음의 문제’가 보이지 않는 것일까. 살아서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고향 사진만 어루만지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애끊는 마음….

마음에 맺힌 원한을 푸는 데는 400년도 충분치 않을지 모른다. 진정한 참회에 이르는 데 걸릴 시간은 또 얼마일까.

정은령 사회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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