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김기현]“귄터 그라스에게 속았다” 들끓는 독일

  • 입력 2006년 8월 15일 19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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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쳐서 노벨상을 받은 거나 마찬가지다. 노벨상을 반납해야 한다.”

독일의 대표적인 좌파 지식인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인 귄터 그라스(78) 씨를 향해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은 며칠 전 그라스 씨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친위대(SS)에 복무한 사실을 60여 년 만에 털어놓았다고 보도했다. “이제라도 고백한 것은 다행”이라는 옹호론이 없지는 않았지만, 빗발치듯 쏟아지는 분노와 실망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폴란드의 레흐 바웬사 전 대통령이 “만나면 악수도 하지 않겠다”고까지 말할 정도다. 바웬사 전 대통령이 노조 활동을 시작한 그단스크의 옛 독일 이름은 단치히. 그라스 씨의 출생지다.

그라스 씨에 대한 비난의 초점은 이번에 고백한 과거의 행적이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많은 독일 청년이 어쩔 수 없이 군대에 끌려가 나치를 위해 싸웠다. 그라스가 전쟁범죄에 가담했다는 증거도 없다.

문제는 그동안의 위선이다. 그는 좌파 평화주의자를 자처하며 반전과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맹렬하게 펼쳐 왔다. 정치적 견해가 다른 우파 정치인과 예술인들에게 온갖 경멸을 퍼부었고 나치 전력을 가진 인사들을 혹독하게 비판했다.

독일 전국유대인협회 샤를로테 크노블로흐 회장은 “그는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도덕적인 것처럼 행동했지만 이번 사건으로 지금까지 그가 한 말들은 모두 우스꽝스럽게 됐다”고 꼬집었다.

그는 왜 이제야 고백했을까. 그라스 씨는 “고백할 수 있는 마땅한 문학적 형식을 찾지 못했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독일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인 헬무트 카라제크 씨는 “노벨상을 받기 위해 숨긴 것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그라스 씨가 자신의 대표작인 ‘양철북’을 발표한 것은 195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이로부터 40년 후다. 노벨상을 기다리며 불리한 사실을 감췄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이번에 ‘깜짝 고백’을 한 것은 다음 달부터 판매될 예정인 회고록 ‘양파 껍질 벗기기’의 홍보를 위해서라는 말까지 나왔다. 놀란 출판사 측에서 “절대 그렇지 않다”는 해명까지 해야 했다.

도덕성을 내세워 ‘문학 외적 권위’까지 쟁취한 그라스 씨는 결국 도덕성 문제로 몰락할 것 같다. 새삼 지식인의 위선과 그 파멸을 돌아보게 된다.

김기현기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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