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정은령]‘460승 486패’의 교훈

  • 입력 2006년 7월 5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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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勝)보다 패(敗)가 더 많았다.

천하무적으로 불렸다던 조남철 국수 말이다.

2일 세상을 떠난 조 국수는 1956년 동아일보와 함께 국내 최초 기전인 국수전(당시 국수 1위전)을 창설한 뒤 이 대회에서 내리 9회를 우승했다. 국수전을 포함해 조 국수의 타이틀 획득은 30회.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유독 눈에 뜨이는 기록은 460승 486패라는 통산전적이다. 승률 48%이니 두 사람이 두어 한쪽은 반드시 지고 한쪽은 이기는 확률에 비춰 보자면 ‘평균’에 가깝다.

으레 ‘천하무적’으로 기억되는 조 국수의 생애 통산전적이 이렇게 된 것은 그의 인생 후반부의 대국 성적 때문이다. 조 국수는 1972년 서른 살 아래 후배 서봉수 9단에게 명인위를 빼앗긴 뒤 다시는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나 영광을 뒤로한 은퇴 같은 것은 그의 생애에 없었다. 오히려 고희를 넘긴 1994년 국기전에 나서 ‘최고령 본선 진출’이라는 또 다른 기록을 남겼다. 생애 마지막 날까지 그의 직업은 프로기사였다.

그를 ‘무적의 기사’로만 기억하는 것은 그의 성취의 극히 일부를 보는 것이다. 1950년대만 해도 바둑은 흔히 ‘돈을 거는 노름’ 정도로 인식됐다. 남편이 큰 대국에 이겨 신문지상에 이름이 오르내리면 젊은 새댁이던 부인 최충순 씨는 이웃 아낙들에게 “노름꾼 총두목 아내”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조 국수가 1945년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설립하며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오락으로 보급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나 1950년 최초의 단위(段位)결정 경기를 연 것은 모두 한국에서 바둑을 제대로 다시 태어나게 하겠다는 꿈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조 국수의 삶에서 무엇보다 극적인 것은 김인 9단과의 인연이다. 1962년 제6기 국수전에서 조 국수와 맞붙어 1승 1무 3패의 성적으로 물러서야 했던 당시 스무 살의 도전자 김인. 국수전 패배 직후 그가 더 큰 세상을 맛보겠다며 일본 유학을 떠날 때 조 국수는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일찍이 자신에게 바둑을 가르친 일본인 은사 기타니 미노루(木谷實)에게 그를 부탁한다는 소개장이었다.

이 편지 한 장을 신원보증서 삼아 기타니 문하에 들어간 김인은 1년 9개월 만에 일본에서 돌아와 마침내 1966년 제10기 국수전에서 조 국수의 국수 자리를 빼앗는다. 자신을 벨 칼을 후배에게 쥐여 주어 한국 바둑계의 차세대를 열게 하고 전성기를 서서히 마감한 조 국수. 그러나 젊은 새 국수에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자 허허 웃으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진즉 져 줄 걸” 했을 뿐이었다.

그가 진정 ‘승부의 달인’인 이유는 패배하는 싸움에도 나아가기를 멈추지 않았던 데 있다. 내가 있기 위해서는 ‘상대’가 존재해야 함을 알았던 데 있다.

“바둑은 절대 혼자서 둘 수 없는 것일세… 결국 강해지기 위해서는 자신보다 더 강한 자들과 최선의 승부를 통해 기량을 키워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지.”(회고록 중)

한국 현대바둑사 최초로 5일 대국수(大國手) 칭호를 받는 조남철 국수.

그의 생애 통산전적은 ‘완승’이다.

정은령 문화부 차장 ry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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