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성희]뭉쳐있는 청중, 흩어진 연사들

  • 입력 2006년 6월 1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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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여론을 이해하는 방법은 가지가지다. 어떤 이는 자기의 의견이 곧 여러 사람의 의견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또 어떤 이는 자기의 의견이 소수 의견일 것이라 생각하고 침묵한다.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전자를 ‘거울효과’라고 부르고, 후자를 ‘침묵의 나선이론’이란 이름으로 부르는데, 실상은 둘 다 올바른 여론 형성과 지각을 방해하는 요소다.

인터넷 시대로 넘어오면서 양상은 좀 더 복잡해진다. 재매개(remediation)라는 그럴듯한 용어로 불리기도 하고, 퍼뮤니케이션(‘펌’+커뮤니케이션)이라는 신조어로 불리기도 하는 무한 다단 복제를 통해 콘텐츠의 세포 증식이 일어나고, 그렇게 증식된 정보가 마치 바이러스처럼 사람들의 생각에 파고든다. 인터넷의 쌍방향 의사소통 기능은 여론 참여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으나, 이른바 ‘슈퍼 댓글족’에 의한 여론의 오도 현상도 심각하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여론은 곧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편의대로 해석되기 십상이다. 친구 셋이서 이야기를 나누다 두 명의 의견이 나머지 한 명과 다를 때에도 “여론이 그게 아니다”라고 이죽거릴 수 있으며, 뻔히 드러난 대세를 두고 “그게 뭐 어때서”라고 무시하는 것 또한 자유다. 어차피 여론이란 시시각각 변하는 데다 각자의 생각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니 나무랄 일도 아니다.

생각 주머니 속 여론은 가끔 바깥나들이를 나와 대통령도 만들고 국회의원도 만든다. 여론의 변덕스러운 성질이 걱정이긴 하지만, 다행스러운 일은 그들의 임기 또한 유한하다는 것이다. 정치인에게 여론은 청중의 마음을 읽게 해 주는 단서고, 그들의 마음을 열게 할 수 있는 열쇠다. 세계인명사전에는 종종 정치인을 ‘커뮤니케이터’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는 청중을 파악하고 움직이는 기술에서 그들을 따라올 직군이 없기 때문이다.

5·31지방선거 결과를 놓고 집권당은 집권당대로, 야당은 야당대로, 또 대통령은 대통령대로 각기 다른 여론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청중의 뜻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쪽은 집권당이다. 당의장이 즉각 사퇴하고 지도부가 해체되면서 재빠르게 새로운 틀 짜기를 모색하는 모양은 상식적인 반응이다. 참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다시 신임을 얻기 위해 변화하려는 모습은 보기 나쁘지 않다. 무능할지는 몰라도 일단 말이 통하고 상식은 살아 있음을 보여 준다. 명색이 집권당이면 무엇보다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한다.

한나라당은 상대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스스로 우등생이라고 여긴다면 오산이다. ‘싹쓸이’에 가까운 압승은 투표용지에 도장을 찍는 정도의 지극히 제한적인 표현 수단만을 지닌 유권자들이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내놓은 의견의 집합체일 뿐이다. 전직 당 대변인은 이번 선거의 승리를 안겨 준 국민을 중국 고사에 나오는 ‘고름을 빨아 준 장수’에 빗대어 “소름 끼칠 정도의 압도적 지지” 운운했는데, 정작 소름이 돋은 쪽은 비위가 약한 유권자들이었다. 국민은 정치인의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들이 아니며, 이번의 선거 결과가 다음번 선거에서 이기라는 메시지는 더더욱 아니다. 희망도 과하면 망상이 된다.

낙제에 가까운 성적표를 들고 온 아이가 “시험 한두 번 잘못 본 것은 문제가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 부모의 마음이 어떨까. 오히려 그 말은 아이가 지나치게 낙담할 것을 염려한 부모가 해 줄 말이 아닐까. 이번에 “선거 한두 번 이기고 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한 대통령의 말이 정상적인 메시지로 유통되는 커뮤니케이션 상황은 아직도 그를 지지하는 2할 정도의 지지자들을 청중으로 상정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들끼리의’ 말을 놓고 다른 사람들이 기막혀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터넷 시대의 문제점 중 하나가 바로 파편화된 청중의 문제다. 이번 선거 결과는 우리의 청중이 생각만큼 파편화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청중은 건재한데 연사들만 파편화되어 있는 꼴이다. 집권당의 재기와 야당의 집권 도전, 대통령의 위상 회복은 8할의 덩어리로 뭉쳐 있는 청중의 마음을 얼마나 제대로 파악하는지에서 갈릴 것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교수·언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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