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도정일]서정(抒情)을 잃어버린 사회

  • 입력 2006년 5월 13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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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에게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세 시인의 이름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 시인들의 시 몇 편은 교과서에서 읽은 적이 있거나 최소한 대학입시 준비하느라 ‘청록파’가 누구누구라며 이름들을 달달 외운 적이 있기 때문이다.

을유문화사가 그 ‘청노루’ 시인들의 합동시집 ‘청록집’을 낸 것은 광복 다음 해인 1946년이다. 청록파의 시를 좋아하느냐, 안 하느냐에 관계없이 ‘청록집’의 출간은 우리 현대 문학사상 중요한 사건의 하나다. 그런데 그 기념비적인 시집의 출간 60주년 되는 날(6월 6일)이 변변한 기념행사 하나 없이 쓸쓸히 지나가게 생겼다고 신문 기사는 전한다.

청록파 구성원 개개인이 문단에 등장한 것은 ‘청록집’ 출간 훨씬 이전인 1930년대 ‘문장’지를 통해서다. 하지만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의 시인이 하나의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서정시 집단’을 당당히 형성하고 나왔다는 것이 ‘청록집’ 출간의 문학사적 사건이다.

그들이 ‘운동’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요즘 식으로 말하면 청록파가 선포한 것은 ‘서정시 운동’이다. 그 출간의 시점도 전혀 예사롭지 않다. 1946년 봄 대다수 한국인이 절박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것은 서정시 운동이 아니라 국가 건설이었다.

해방된 강토에 어떤 나라를 어떻게 세우고 민족의 운명을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라는 문제 앞에서의 정치적 상상력이 다른 모든 에너지를 몰수하고 있던 때다. 그 시점에 일단의 시인들이, 마치 달나라에서 살다 온 사람처럼 청노루를 노래하고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와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의 승무를 읊조리고 나온 것이다.

‘청록집’ 출간이 문학사적 사건을 넘어 문화사적 정신사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그 지점에서다. 의미의 핵심은 ‘서정의 상실’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에 있다. 식민지시대에도 서정의 상실이 방지되어야 한다면 해방공간에서의 혼란기에도 서정의 상실은 거부되어야 한다. 이것이 ‘청록집’ 출간이 지닌 정신사적 의미다.

인간의 삶에는 정치의 계절을 넘어서는, 훨씬 더 근본적인 상위의 리듬이 필요하고 시는 그 상위 질서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시론(詩論)임과 동시에 이미 그 자체로 사회적 사유의 일종이다. 청록파 시인들의 이런 자세는 그들의 업적에 대한 판단의 편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소중하게 기리고 기억해야 할 정신적 유산이 아닐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정치의 계절 말고도 뜨거운 시장의 계절, 경제 제일주의의 세찬 계절풍에 정신없이 휩쓸리고 있다. 정서는 말라붙고, 서정은 먹다 버린 대추씨처럼 길바닥에 떨어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며, 인간을 위대하게 하는 것의 90%는 그의 정서적 능력에서 나온다. 그 정서적 능력의 소중함을 환기시키는 것이 시의 진실이고 문학의 가치다. 지금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그 가치의 세계를 망각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망각을 되레 즐기고 있다.

사회적 위기가 따로 없다. 청소년의 경우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청소년을 잡아끄는 허섭스레기 유혹이 너무 많고, 어른 사회의 상술과 타산이 가치의 세계에 대한 청소년의 입주를 조직적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다.

기억할 것을 기억하지 않고 기려야 할 것을 기릴 줄 모르는 사회는 이미 거대한 상실의 사회다. ‘청록집’ 출간 60주년의 날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그 상실의 크기를, 우리 자신의 메마른 자화상을 보여 주게 될지 모른다.

도정일 문학평론가 ‘책 읽는 사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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