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김서령]정겨운 사투리가 그립구나

  • 입력 2006년 4월 28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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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첩다’란 말이 있다. 어린 내가 큰으매(친할머니)에게 가위를 갖다 드릴 때 날을 내 쪽으로 하고 손잡이를 큰으매 쪽으로 돌려서 드리면 한방 모인 할매들은 입을 모아 엄첩다고 말했다. 굳이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인 ‘표준말’로 따지자면 ‘기대 이상이다’ 쯤으로 해석될 말이었다. ‘어린 줄 알았는데 다 자랐구나’라는 안도와 만족과 대견함이 흐뭇한 웃음에 버무려진 ‘엄첩다’는 어른이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최상의 칭찬이었다. 호들갑스럽지 않았고 인색하지도 않았다. 내가 언제나 너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노라 하는 위엄과 참 잘했다는 격려가 동시에 담겨 있었다. ‘엄첩다’란 말을 들으려고 나는 혼자 단추를 끼우고 혼자 머리를 빗고 혼자 방 정리를 했다.

그 ‘엄첩다’는 말이 사라져 버렸다. 고향에 가도 아무도 그 말을 쓰지 않는다. 아이에게 일정거리를 유지하는 위엄 있는 칭찬 말 대신 껴안고 입 맞추는 애정 공세만이 그득하다. 쓸쓸하다. 날더러 엄첩다고 칭찬해 줄 어른이 사라져 버린 것도 쓸쓸하지만 그 말을 다디달게 음미하며 세상 질서를 배운 주제에 정작 그 그리운 단어를 내 혀에서 놓쳐 버린 게 더 기막히다. 표준말만이 고급언어인 줄 알았다. 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 따위는 박대하고 무시했다. 내 어머니 말인 사투리를 경멸하고 수치스러워했으니 그 말을 달고 사는 어머니까지 낮춰 보고 부끄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말과 집 말이 달랐다. 집에서는 큰으매라고 부르고 학교에선 교과서에 나오는 대로 할머니라고 글을 썼다. 이중의 자아가 생겨났다. 그게 중층의 겹이고 두께라면 좋았을 텐데 하나가 하나를 억누르니 문제였다. 학교 교육이 길어지고 표준말에 익숙해지면서 당연히 내 혀는 사투리들을 잊었다. 단 한 음절에 수백 마디 의미를 함축하던 다채로운 감탄사와 정이 뚝뚝 듣는 향기로운 종결어미들과 섬세하고 정교해 후드득 날개 쳐 올라갈 듯한 생생한 형용사들을 내 머리는 다 밀어내 버렸다. 표준말이 아니란 죄로 팽개쳤던 보물들, 금쪽같은 그 말들은 지금 어디로 사라졌나.

세상이 어디나 똑같아졌다. 남원도, 통영도, 부산도, 광주도 서울거리와 다를 바가 전혀 없다. 똑같은 치킨 집에, 똑같은 아파트에, 똑같은 커피가게만 즐비하니 도무지 공간이동한 실감이 생기질 않는다. 전에는 지방마다 위풍당당하게 귀를 울리던 사투리가 있었건만 그걸 듣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텔레비전과 교통 발달의 영향인지, 표준말 교육의 개가인지. 아무튼 퍽도 재미없는 일이다.

표준말을 규정한 ‘한국맞춤법통일안’이 만들어진 건 1933년이었다. 당시 일본은 선민의식을 바탕에 깐 국어정책을 추진 중이었고 ‘도쿄 야마노테선 내부의 도쿄 말씨’를 일본의 표준어로 정해 놓고 있었다. 그 수도 중심 어문원칙을 우리도 별 수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후 일본은 표준어 대신 공통어 정책으로 전환하고 수차례 대대적인 언어지표조사로 국민 대다수가 사용하는 공통어를 선정하는 데 큰 공을 들였다. 우리만 70년 넘게 반성 없이 ‘교양 있는 서울사람의 말’만을 표준어로 삼고 있었다. 교양은 뭐고 서울사람이란 또 누구란 말인가. ‘엄첩다’고 칭찬하던 안동 할매들의 언어는 교양 없는 시골사람의 말이어서 표준말에 편입될 가치가 없었던가. 물론 말의 효율성을 높여 주는 언어 규범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특정 지역 말을 규범어로 정해 놓고 다른 지역 말은 사투리로, 이급 언어로 소외해 버리는 배타성이 문제라는 거다. 우리도 ‘나라 안 어디서나 의사소통이 가능한, 공통성이 가장 많은 현대어’로 표준어 개념을 확대해야 한다. 그래야 평양 말을 문화어로 규정한 북한과 통일 이후의 언어 갈등을 미리 막을 근거도 생긴다. (이상규 저 ‘위반의 주술, 시와 방언’ 참조)

요즘 나는 시간 날 때마다 아슴아슴해진 옛말들을 찾으려고 안타깝게 허공을 휘젓는다. 우리 어머니가 일상어로 쓰던 알찌근하다, 간조증난다, 시어득하다, 얼분시럽다 같은 말들, 그 말들 안에는 어머니 일생을 지배했던 정서가 화석처럼 박혀 있다. 전라도 강원도 제주도 방언들은, 비록 내가 거기서 자라진 않았어도 충분히 알아들을 만하다. 따스하고 풍성하고 정다워 눈물겹다. 오늘도 혀에 뱅뱅 도는 말들을 떠올리려 자꾸만 사전을 뒤져 댄다. 그러나 암만 뒤져 봤자 소용없다. 표준어 아닌 말이 사전에 실렸을 리가 없다. 제대로 된 방언사전이 만들어지고 그게 결국 표준어로 편입될 날을 학수고대한다. 어매와 아지매와 할매가 쓰던 말의 정감을, 그 내음새와 빛깔과 감촉을 잃어서는 나는 내가 아니다. 아까운 사투리를 더는 잃어버릴 수 없다.

김서령 생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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