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전승훈]간판 중시 사회가 낳은 ‘가짜 박사’ 코미디

  • 입력 2006년 3월 21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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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음악대학들은 교수 채용 때 오디션을 중요시하지만 그에 앞선 서류심사는 학위를 절대시하죠. 심지어 실력 있는 연주자를 교수로 뽑고 싶은데 박사 학위가 없을 경우에는 ‘학위 문제만 해결해 오면 어떻게 해 보겠다’고 넌지시 말해 주는 경우도 있어요.”

러시아 음대 가짜 석박사 학위 매매 사건(본보 20일자 A2면)을 보고 한 음악계 인사는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반응을 보였다. 학위를 준 측이나 학위를 산 사람이나, 교수로 채용한 대학들이 모두 알고 있던 공공연한 비밀이 터졌다는 설명이다.

이번 사건은 워낙 엉터리 학위라 대학 측에서 충분히 검증할 수 있었는데도 묵인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모 음대 작곡과의 경우 교수 5명 중 3명이 문제의 러시아 음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모두 가짜 학위가 아닐진 몰라도 사전 검증을 못했을 리는 없다. 한 학생은 “선생님이 러시아 유학을 다녀오셨다고 했는데, 논문 번역을 러시아어과 학생에게 맡기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말했다.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으로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었던 학계는 이번 가짜 학위 매매 사건으로 다시 한번 치명상을 입었다. 차제에 교육 개방 바람을 타고 급증하고 있는 외국 대학과의 통신 교육, 방문 교육 등 다양한 학위 취득 과정의 옥석을 가리는 검증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코미디 같은 일이 빚어진 근본 원인은 실력보다 ‘증(證)’을 중시하는 풍토 때문이라고 음악계 관계자는 입을 모은다. 한 시간강사는 “실기 실력이 충분해도 박사 학위가 없으면 대학원생을 가르치기 어렵고, 박사 논문 심사도 못하기 때문에 현직 교수도 가짜 학위에 대한 유혹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 배웠든 음악은 똑같기 때문에 검증이 가장 쉽다”며 “외국의 경우 학위보다 오디션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러시아가 낳은 천재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생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과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를 지냈지만 박사 학위는 없었다. 학위보다 실력을 중시하는 풍토가 돼야 가짜 학위 소동이 재발하지 않을 것이다.

전승훈 문화부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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