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창혁]삼국시대(三國時代)

  • 입력 2006년 1월 14일 03시 02분


코멘트
일본 정부가 새해 들어 가장 먼저 내놓은 대외행동은 아소 다로(麻生太郞) 외상을 인도에 보내는 일이었다. 아소 외상은 3일부터 6일까지 인도 뉴델리와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를 방문했다. 타깃은 인도였다.

그 뉴스를 접하는 순간, 속에서 절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아니 신음이 흘러나왔다. 좀 비약일지 모르지만 ‘철학이 있는 외교’의 현장을 목격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소 외상의 인도 방문을 계기로 양국이 합의한 것은 두 가지다. 연례적인 비확산(Non-Proliferation) 회담을 열고, 장관급의 전략대화를 출범시킨다는 것이다. 얼핏 보면 매우 실무적인 합의사항 같지만 그 속에 담긴 지정학적(地政學的), 지경학적(地經學的) 함의는 간단치 않다.

우선 비확산 회담에는 ‘첨단 기술 거래’가 포함돼 있다. 인도가 그렇게 목말라하던 첨단 핵에너지 기술 지원도 논의할 수 있다는 뜻이다. 미국도 그랬지만 일본도 1998년 인도가 핵실험을 강행한 뒤 핵에너지 기술 이전을 금지해 왔다. 하지만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지난해 인도에 대한 핵 기술 금수조치를 해제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번엔 일본이 긍정적 신호를 보낸 것이다.

아소 외상은 그 대가로 일본-인도 간 장관급 전략대화 개최를 관철했다. 한국과 일본 간에 정상 상호 방문 프로그램이 있긴 하지만, 일본이 장관급 정례 전략대화 모임을 열고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미국과는 외교 국방장관이 참석하는 이른바 ‘2+2 모임’을 정례적으로 개최하고 있다. 탄성과 신음을 자아내게 하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일본은 삼국시대(三國時代)를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을 곁에 두고 있는 우리는 ‘삼국’ 하면 보통 한중일 3국을 떠올리지만, 일본인의 전통적 세계관에서 삼국은 일본 중국 천축(天竺)을 지칭한다고 한다. 천축은 인도다.

아시아는 이미 중국 일본 인도의 삼국체제로 재편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60주년인 2005년이 삼국체제의 맛보기를 보여 준 해라면, 올해는 본격적인 역동성을 과시하는 해가 될 것이 틀림없다. 아소 외상이 인도를 방문하자 UPI통신은 인도의 정치평론가 라지브 샤르마 씨의 말을 인용해 “아시아의 정치 지형이 재편되는 신호탄”이라고 보도했다.

일찍이 이런 때가 없었다. 일본과 중국이 동시에 슈퍼파워였던 적도 과거 몇백 년간 없었지만, 삼국이 아시아의 세계적 강국으로 각축을 벌이던 시대도 없었다.

2005년 12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미국이 빠진 동아시아정상회의(EAS)’가 처음으로 열리기 직전. 서방 언론이 ‘아시아의 멘터(Mentor)’라고 부르는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초대 총리는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중국과 인도, 두 고대 문명의 부활은 아시아인들에게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시아 번영의 시작일 수도 있고, 새로운 패권 다툼의 신호탄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두 문명의 부활’을 맞아 일본이 준비하는 삼국시대의 미래는 ‘양날의 칼’보다 훨씬 복잡한 방정식이 될 것이다. 새해 첫 삽에 시대를 담아낼 줄 아는 일본의 철학이 부럽다.

김창혁 국제부 차장 chang@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