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874년 윈스턴 처칠 출생

  • 입력 2005년 11월 30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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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미국 백악관의 내빈용 침실. 막 목욕을 끝낸 처칠이 벌거벗은 채로 방안을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루스벨트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루스벨트는 알몸인 처칠을 보고 흠칫 놀랐다. “실례했다”며 황급히 돌아서는 그를 처칠이 불렀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보십시오! 각하. 저는 당신에게 숨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과 미국이 함께 싸우게 된 것은 처음부터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처칠은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루스벨트에게 확신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를 사로잡기란 쉽지 않았다. 그는 계산적이었고 냉정했다. 교활하기까지 했다. 그런 그를 향한 처칠의 구애는 뜨거웠다. 그가 백악관에 보낸 편지는 이렇게 끝맺곤 했다. “내 생각은 항상 당신에게 가 있습니다….”

처칠은 스스로를 기꺼이 ‘(루스벨트) 대통령의 부관’이라고 불렀고 종종 “그것은 전적으로 보스(루스벨트)의 결정에 달려 있다”고까지 말했다.

세계대전의 화염 속에서 연단된 두 사람의 우정은 특별한 것이었으나 애초에 처칠의 헌신이 없었다면 그건 불가능했다.

시가를 물고 ‘V’자 사인을 해 보이는 처칠의 모습은 거인의 풍모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정치 사가들은 “그의 삶 자체는 온통 잔인한 역설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인종차별에 맹렬히 반대했으나 끝까지 백인이 우월하다고 믿었다. 열렬한 반공주의자였음에도 스탈린과 동맹을 맺었다. 독일의 드레스덴에 대한 폭격을 명령해 민간인 3만5000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은 휴머니스트를 자처한 처칠이었다.

40대에 노동당에서 보수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는 이런 명언을 남긴다. “20대에 진보적이지 못하면 마음(heart)이 없는 것이고, 40대에도 진보적이면 정신(mind)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용기 있는 지도자였다. “우리는 역사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냉철한 현실인식을 갖고 있었다. ‘선의 허약함이 악의 야심을 키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전쟁 초기에 영국은 군사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으나 그는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단호함은 영국 국민이 도저히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은 고난을 이겨 내는 힘이 되었다.

대영제국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처칠. 그의 긴 생애를 관통한 신념은 이러했다. “결코, 결코, 결코 포기하지 말라!”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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