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박수룡]북한산도 안 가보고 만리장성 갑니까

  • 입력 2005년 11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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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다 떠난다. 이름도 낯선 몰디브나 피지로 몰려가고 태국이나 중국은 이웃 마을 가듯 다닌다. 진짜 좋은 건 바로 우리 곁에 있는데….

내가 가 본 곳에 그들도 가 봤을까. 토함산 석굴암을 거듭 보면서 둥근 모양의 궁륭천장 바로 밑에 있는 본존불보다 11면 관음보살상이 더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춰진 듯 드러나는 부조 입상으로 어깨를 따라 조용히 흐르는 선, 허리를 감고 도는 형상의 옷 주름은 생시 아름답던 보살이 손이라도 내밀 듯 착각을 일으킨다. 환조보다 부조가 더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한국의 미는 역시 형(形)보다는 선(線)이라는 생각을 한 것도 그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도 끝자락 해남으로 가다 보면 미황사라는 단아한 사찰이 있다. 풍상에 씻긴 모습 그대로 단청도 없이 서 있다. 그곳에서 만난 낙조는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해넘이가 또 있을까 싶을 만치 매혹적이었다. 울울창창한 동백나무 숲 너머로 떨어지는 시뻘건 불덩이. 크고 작은 선과 빛의 향연은 물먹은 화선지에 붉은 물감 풀리듯 번져 가는 형상이다. 역시 다시 봐도 좋은 것이 우리 것이 아닌가.

베니스 비엔날레의 성공 비결을 취재하기 위해 방송사의 리포터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행사 내용보다 건축 장식물에 먼저 기가 탁 질렸다. 베네치아 바다 속 점토질 바닥에 나무를 꽂아 기초를 다지고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다듬어 놓은 물의 도시. 나폴레옹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산마르코 광장이라고 극찬하면서 이곳에 와서야 꿈이 비로소 현실인 것을 알았다고 했던가.

석회석은 연질의 재료이다 보니 톱으로 깎이고 손톱으로도 긁힌다. 그래서 섬세함 그대로 정밀 묘사가 가능하다. 하지만 석회석이나 대리석 작품은 풍화 작용에 취약해서 야외 조각으로는 적절치 못하다. 반면에 우리 화강석은 강도가 매우 높다. 정으로 쪼고 망치로 두들겨서 새긴 질감과 색감들은 깊은 우리 정서 그대로 투박하나 밀도가 있는 작품들이다. 운주사의 와불을 보라. 거칠면서도 서툰 모습이 얼마나 정겹고 한국적인가.

경복궁 기행열전을 몇 년을 두고 보고 또 쓰던 친구가 있다. 그는 경복궁 공포(공包)에 십자 형태로 쌓고 엮은 살미를 보면 우주의 삼라만상을 느낀다고 한다. 그의 손에 이끌려 경복궁을 몇 차례 다녀 보고 그동안 나의 여행이 진정한 미학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 문화를 알고부터는 막무가내식의 외국 여행을 나 스스로도 자제하게 되었다. 가끔 북한산을 한 번도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이 만리장성에 올라 찬탄하는 모습을 보고 나 자신 지난 천객(賤客) 때의 모습을 떠올린다. 유명세만 내세운 상술에 분별없이 현혹된 것은 아닌지. 좀 더 균형 있는 여행 목적을 가져 보자.

고등학교 수학여행을 떠나면서 담임선생님이 한 말씀이 떠오른다. 옛날에는 글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산천경개와 풍류를 찾아가서 자신의 감성을 가다듬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책을 통해서 느낄 수 없는 감흥을 여행을 통해 배우는 것인데 이를 닦을 수(修) 배울 학(學) 수학여행이라 하셨다. 이국적 풍물을 둘러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전공이나 적성에 맞는 목적지를 찾아서 미래의 진로에 도움이 되는 여행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곧 겨울방학, 여행철이다. 요즘 배낭여행 하지 않는 대학생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해외여행도 좋지만 우리나라도 좋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내 가까이 있는 곳, 우리 주변의 풍광 찾아 나들이를 해 보면 어떨까. 좋은 햇빛, 좋은 바람. 눈으로 보아 즐거움을 느끼는 데에서 훌쩍 벗어나 큰 의미를 담아 올 수 있을 터이다.

박수룡 서양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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