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익섭]결식아동, 중앙정부가 책임져야

  • 입력 2005년 10월 2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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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60년대를 지내 온 사람들은 누구나 ‘배고픈 설움’에 대한 공감이 있을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끼니를 거르지 않았는지 묻는 것이 안부였다. 식사 때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밥상을 나누는 것이 큰 미덕이었다. 모두가 곤궁한 시절이니만큼 끼니때는 이웃을 눈치 없이 찾아가는 일도 삼갔다.

지금은 ‘참살이(웰빙)’와 ‘다이어트’에 대중적 관심이 쏠리는 시기다. 그래서 간혹 수돗물로 배를 채우는 결식아동 이야기와 장롱에서 굶어 죽은 채 발견된 아이의 기사를 접하면 더 놀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이 배고픈 시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시 빈민들이 운집한 산동네와 판잣집은 많이 없어졌지만 빈민층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여기에다 경제 위축과 청년 실업의 증대,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진입하고 있는 고령화 사회, 중산층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빈민층으로 전락하게 되는 사회 현상에 대한 우리의 대안은 무엇인가?

사회문제, 특히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사회복지 정책과 서비스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이미 경제적, 사회적 격차에 따른 문제가 정책적, 문화적, 정치적 차이로 굳어지고 있다. 지금 추진되고 있는 사회복지 정책이 과연 이러한 틈새를 메울 정도의 근본적 해법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깊이 있게 점검할 필요가 있다.

21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결식아동 이러다 다시 굶을 판’이라는 기사는 이러한 사회 현상을 재확인해 주었다. ‘도시락 파문’으로 비판 여론에 몰려 급식 지원 대상 확대 및 단가 인상이라는 대응책을 내놓았지만 전체 예산은 증액하지 않아 예산이 조기 고갈되고 아이들이 다시 굶을 위기에 몰리고 말았다. 급식 말고는 끼니를 해결할 수 없는 절대빈곤 아동에 대한 행정이 이런 수준이었던 것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제도나 정책에 있어서 역할 분담의 원칙이 명확하고 시행에 대한 합의와 책임성이 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들이다. 놀랍지 않은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며 곧 선진국으로 발돋움한다는 대한민국에서 급식 지원을 받아야 하는 어린이가 24만9463명이라니….

세계 어느 곳을 둘러보더라도 절대빈곤과 아동생존권 및 인권은 국가의 책임이다. 지자체의 역할 강화와 지방분권화라는 도도한 시대적 추세를 거스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양극화 현상을 묵과한 채 생존권과 관련된 사업을 충분히 숙고하지 않고 무리하게 지방으로 이양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고통 받는 사람들의 울부짖음에 국가가 귀를 막는 크나큰 실책을 범할 수 있는 일이다.

사회복지 정책이나 서비스는 그저 ‘적절한 예산 범위 안에서 잘 나누어 준다’는 방식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안일한 생각으로는 ‘있으면 주고 없으면 그만’인 시책과 서비스에 머무를 것이다. 또 그래서는 ‘사회복지 정책이 여론몰이에 휘둘리고 있다’거나 ‘정치적 도구로 전락했다’는 조롱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복지의 대상이 되는 계층이 형성되는 원인과 메커니즘은 시대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절대빈곤’의 양상으로 나타난다는 공통점이 있다. 따라서 사회복지 사업은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빈곤 해결책과 함께, 당장의 급박한 현실에 대응하는 미봉책을 동시에 갖춰야 한다. ‘그물’도 필요하지만 ‘물고기’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올바른 복지정책이 되기 위해서는 본래 무엇 때문에 실행하려고 한 것인지, 여기에서 소외되는 생존권은 없는지 하는 문제 제기가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익섭 연세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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