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강경근]도청, DJ정부 책임질 일 없다더니…

  • 입력 2005년 9월 29일 03시 0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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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불법 감청 테이프’를 MBC가 입수하자 일부 언론이 관련 내용을 보도하고, 이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미림팀이 행한 도청 테이프 274개가 검찰에 압수되면서부터 ‘X파일’ 사건이 세상에 나왔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고, 무늬만 ‘문민정부’이고 ‘국민의 정부’라 자칭한 민주화 정부였지 기실 그 속은 그들이 그렇게 타기(唾棄)한 전 정권들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파문 초기에 국가권력의 조직적인 도청보다 더 본질적인 것은 그 속에 담긴 내용을 공개하여 이를 파헤치는 것이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라 하는, 대중의 귀에 솔깃한 주장이 있었다. 정부는 처음부터 단호하게 그런 식의 접근은 입헌정부의 국가권력이나 정부가 취할 바가 아님을 분명히 말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여권은 이미 불법으로 규정된, 도청 테이프의 내용 공개를 소급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특별법’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 것이다. 소급입법 금지라는 법치주의 헌법 원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일이었다. 야당도 이에 질세라 불법이기는 오십보백보인 ‘특검법’을 만들어 염탐한 내용을 공개하는 일에 정당성을 부여하려 애를 썼다.

심지어 현 정부의 책임자는 국민의 정부가 책임질 과오는 없다고까지 하였다. 당시의 국정에 책임을 져야 할 김대중 전 대통령은 X파일 의혹 후 한때 입원까지 하였고, 이종찬 천용택 임동원 신건 씨 등 당시 국정원장들은 현 국정원장을 찾아가 조사 중단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노무현 정부는 국민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권이 국민을 염탐하여 구린 구석을 찾아내 이를 정의의 이름을 빌려 벌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자기부정에 이르는 도착적 관음증과 다름없다는 점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 지난 정권하에서의 불법적 감청이 조직적인지를 가려 정부권력의 정당성을 새롭게 밝힐 수 있는 기회도 잃었다. 겉과 속이 같은 민주정부를 세워야 한다는 X파일의 교훈을 잊은 채 그렇게 한여름을 보낸 것이다.

그런데 최근 반전(反轉)을 기약하게 해 주는 사실들이 밝혀졌다. DJ 정부 시절 국정원의 불법 감청의 진상이 국정원 직원들의 자백과 검찰 수사로 거의 확인된 것이다. 유선중계통신망 감청장비(R-2)를 이용해 유력 정치인들의 통화 내용을 도청했다는 것과 2002년 대통령선거 직전 한 야당 의원이 폭로한 문건이 국정원에서 작성됐다는 것이 그것이다. 김승규 국정원장이 지난달 5일 도청 사실을 처음으로 고백한 지 50일 만이다.

전직 국정원장들이 이르면 주말부터 소환될 예정이라 한다. 이제는 지금껏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부인으로 일관해 온 DJ 측근들 및 전직 국정원장들이 진실을 밝히는 고해성사를 해야 할 때다. 대(對)국민 사죄는 물론 법적 책임까지 생각하는 공인(公人)된 자세를 보여야 한다. 국정원은 2002년 3월 이후 R-2, 카스(CAS)를 모두 폐기했다지만, 개정 전 통신비밀보호법의 공소시효(5년)를 적용하더라도 2000년 9, 10월 이후 도청이 이뤄졌다면 사법 절차를 거치는 데는 문제가 없다.

노 대통령이 “도청은 과거 청산 차원에서 반드시 규명한다”고 했다면, 그것은 도청 내용을 공개해서 거기 나온 일들을 잡아 경치는 것이 아니라 도청을 자행한 정부와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걸 위한 특별법, 특검법과 국정조사 등을 행해야 한다. 노 대통령은 “현 정부의 도청 여부 조사를 지켜보자”고 한 바 있다. 그 지켜본 결과가 이제 나타났다. 어떤 정당이 말한 바를 빌려서 얘기하자면 국가의 틀을 다시 짜더라도 진상을 밝혀야 하는 것이다.

강경근 숭실대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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