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조 국]판사 재량권, 남용도 박탈도 안된다

  • 입력 2005년 9월 23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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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천정배 법무부 장관이 형사 사법의 투명성과 예측 가능성을 높이기 위하여 양형기준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에 판사들은 양형기준법은 판사의 고유 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라며 반발하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얼마 전 검사 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둘러싼 검찰과 법원 간의 대립에 이어 두 기관의 충돌이 재연될 조짐이 보인다.

여기서 먼저 양형기준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문제가 제기된 원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재 불법의 양과 질에서 유사한 범죄를 범하였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판사가 재판을 담당하느냐, 어느 법원에서 재판을 받느냐에 따라 피고인들이 받게 되는 선고 형량에는 상당한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법원이 절도, 폭력 등 ‘블루칼라 범죄’에 비하여 권력형 부패 비리, 경제범죄 등 ‘화이트칼라 범죄’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점, 자력(資力)이 있어 수임료가 높은 변호사를 고용할 수 있는 피고인의 경우 ‘전관예우’를 이용하여 가벼운 양형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은 판사의 양형에 대한 사회적 비판을 가중시켜 왔다.

이 밖에도 1심에서 2심으로 항소하게 되면 왜 선고 형량이 거의 자동적으로 감경되는지, 유죄와 무죄의 근거만큼이나 중요한 양형의 이유에 대하여 왜 판결문은 상세히 밝히고 있지 않은지 등의 의문에 대해서도 법원은 명확한 답변을 한 적이 없다. 생각건대 법원은 양형기준법 제정 요구에 대하여 “양형은 판사의 고유 권한이다”라는 말로 항변하기 이전에 지금까지 판사의 양형 재량이 ‘내재적 한계’를 지키며 행사되어 왔는지를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전적으로 판사의 재량에 맡겨져 있던 양형의 기준과 절차를 객관화하고 투명화한다는 점에서 양형기준법은 필요하다.

그렇지만 만약 양형기준법의 이름 아래 판사의 양형 재량을 박탈하거나 중대하게 제한한다면 이는 위헌이다. 만약 몇 가지 양형 인자(因子)를 넣으면 선고 형량이 기계적으로 도출되는 양형기준법이 만들어진다면, 검사가 결정한 공소사실과 구형량에 판사가 사실상 종속되어 버려 판사는 ‘형량 자동판매기’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동일한 범죄로 기소된 범죄인들이라고 하더라도 범죄의 원인, 범죄인의 반사회성, 범죄인의 배경과 처지 등은 상이할 수 있다. 따라서 판사는 이상의 점을 고려해 피고인의 ‘재(再)사회화’를 위해 어떠한 양형이 적정한 것인지를 개별적으로 검토한 후 최종적으로 양형을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 시기에 필요한 것은 미국 연방범죄에 적용되는 기속력(羈束力) 있는 양형기준제도가 아니라 미국 개별 주와 영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참고적 양형기준제도’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과거 대법원 산하 사법개혁위원회 역시 이 방안을 건의한 바 있다. 이때 법률가나 법학자 외에 범죄학자, 교정학자 및 관련 실무가 등 폭넓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양형위원회가 법적 근거를 가지고 조직되어야 하고 이 위원회는 판사의 양형 판단에 참조가 되도록 특정 유형의 범죄에 대한 가중·감경인자와 최저선고형 등을 규정하는 지침을 작성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판사가 개별 사건에서 이 기준과 다른 양형을 결정할 때는 그 이유를 판결문에 명기하도록 하여 이후 양형의 적정성에 대한 다툼의 근거를 남기도록 해야 한다.

또한 그 이전이라도 대법원은 이미 확보하고 있는 양형 사례를 증보 발간하고 일본식으로 양형 데이터베이스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에 착수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현행 형법의 범죄구성 요건과 법정형이 세분화되어 있지 못한 것도 양형 편차의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이 종종 간과되고 있다. 법무부와 국회는 형법 개정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양형기준법의 제정은 형사사법 운영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다. 현 시기에 필요한 것은 ‘고무줄 형량’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해소하면서도 동시에 구체적 사건에 대한 법관의 양형 판단을 존중하는 양형기준법이다.

검찰과 법원은 이 문제를 둘러싸고 ‘힘겨루기’를 할 것이 아니라 공동공청회 또는 사법개혁추진위원회 내부 논의 등을 통해 합리적 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조 국 서울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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