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552>卷六.동트기 전

  • 입력 2005년 9월 2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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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박순철
그림 박순철
한신은 무덤덤한 얼굴로 한왕의 뜻을 받아들였다. 당장 제나라로 쳐들어가라고 자신의 등을 떼밀 듯 조나라로 내쫓은 지 두 달도 안돼 다시 역이기를 제나라에 세객(說客)으로 보내는 것이 한왕의 온당치 않은 변덕처럼 느껴졌으나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다.

역이기는 한단에서 며칠 여독(旅毒)을 풀고 지친 말을 바꾼 뒤에 제나라로 떠났다. 길을 떠난 첫날 저물 무렵 하수(河水)를 만나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하수를 건넌 지 또 하루 만에 동아(東阿)에 이르렀다. 동아는 한단에서 하수를 건너 제나라로 들면 처음 만나게 되는 큰 성읍이었다. 역하(歷下)와 견줄 바는 못 되었으나, 그곳에도 전씨(田氏) 일족의 장수 하나가 적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성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한나라의 사신으로 역이기라 하오. 우리 대왕의 명을 받들어 제왕(齊王)을 만나러 임치(臨淄)로 가는 길이니 성문을 열어주시오.”

성문 가까이 수레를 댄 역이기가 문루에 나와 선 제나라 장수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한신이 곧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올 거란 소문에 바짝 긴장해 있던 제나라 장수가 경계하는 눈길로 역이기 일행을 살펴보았다. 왕이 보낸 사신답게 위의를 갖추고 있었으나, 따르는 군사가 많지 않아 안으로 들여도 별일 없을 듯했다.

성문을 열어주자 성안으로 들어온 역이기는 제 밑에 있는 사람 부리듯 제나라 장수에게 말했다.

“왕사(王使)가 먼 길을 무릅쓰고 왔으니 어서 전사(傳舍)로 안내하시오. 그리고 임치에 계시는 제왕께 사람을 보내 내가 가고 있음을 알려주시오. 도중에 있는 역하에도 기별을 놓아 우리 사행(使行)길이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오.”

그런 역이기의 위엄에 눌렸는지 동아를 지키던 장수가 군소리 없이 역이기의 요청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다시 이틀 뒤 역이기가 역하에 이르렀을 때는 형편이 달랐다.

역하는 역성이라고도 하는데 뒷날의 제남(濟南)이 바로 그 땅이다. 역하는 제수(濟水) 가에 서있는 성으로서, 하수(河水·황하) 가에 있는 평원성이 무너지면 그 다음으로 산동을 지키는 요충이 된다. 그때 역하는 전간(田間)이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지킨다고 되어 있었으나 실은 전해(田解)와 화무상(華無傷)이라는 장수가 지키고 있었다.

전해와 화무상이 대군을 이끌고 역하에 머물게 된 것은 조나라에 있는 한신이 대군을 이끌고 제나라로 쳐들어오리라는 소문 때문이었다. 한신이 배수진으로 조나라의 20만 대군을 쳐부순 일은 그때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제나라 장졸들은 조금도 겁먹지 않았다. 패왕 항우를 물리친 그 기세로 오히려 한신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왕의 사자가 온 것은 우리 대왕을 달래기 위함일 것이다. 먼저 우리 군사들의 기세를 보여 주어 한왕의 사자가 우리 제나라를 업신여길 수 없게 해야 한다.”

역하에 이른 역이기가 성문을 열어주기를 빌자 전해가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을 둘러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가만히 이르기를, “그대들은 되도록 많은 기마와 갑졸(甲卒)을 성문 안팎으로 늘여 세워 우리 제군(齊軍)의 위엄을 떨쳐 보이도록 하라”라고 한 뒤 역이기로 하여금 성밖 멀리서 수레에서 내려 성안으로 걸어 들어오게 하였다.

글 이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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